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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Apr 02. 2024

나라인 척하는 이 도시의 매력

싱가포르살이 3년 차... 만 2년 하고 3개월이 넘었다.

처음 2년은 그저 지겹고 더운 작은 나라였다. 나라인척하는 도시국가에 불과한 이곳이 3년 차가 될 무렵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애 시절에도 남들은 허구한 날 간다는 영화관 데이트 대신 맛집 찾아 전국을 다니던 부부였다. 여행을 할 때면 8할이 먹는 즐거움인 우리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의 발령으로 싱가포르 주재원 생활을 하게 된 건 행운이었을까?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이렇게 세 나라의 문화가 주를 이루는 이 나라는 각 문화가 서로 섞여서 매력적인 식문화로 발전했다는 걸 깨달았다. 세 나라의 음식이 서로 믹스되어 싱가포르 음식과 페라나칸 음식으로 탄생되었고 이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맛난 음식 하나는 참 많은 미식의 나라가 맞았다. 우리 가족은 이 맛있는 곳들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맛있는 거 찾아 밖으로 다니는 게 우리 가족의 취미이자 해외살이를 버티는 낙인 것 마냥 되어버렸고, 오랫동안 살림 콘텐츠로 가득했던 나의 계정은 싱가포르에 사는 나의 단골집을 공유하는 릴스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콘텐츠의 방향이 살짝 틀어진 건 그저 이곳이 미식의 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림하기 참 힘든 구조인 이 나라의 주방도 아주 큰 몫을 했다.

우리나라처럼 오픈키친이 아니라 분리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인데, 웻키친과 드라이 키친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엔 웻키친은 창문틀 없이 뚫린 공간에 있기도 하고 칸막이나 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어서 조리 시 집안으로 냄새가 들어오지 않게 아예 막아버리는 형태로 설계되는 경우가 많다. 또는 주방 자체가 하나의 방처럼 문이 달린 공간으로 되어있기도 하다. 나라에서 제공되는 HDB 같은 경우엔 주방이 아예 없는 곳도 있는데 이 경우엔 대부분의 HDB단지 안에는 호커센터가 있어서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 더운 나라에서 이토록 폐쇄적인 주방에 에어컨 없이 밥 하다 보면 진이 빠져서 정작 밥 먹을 때 입맛이 없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방의 끝은 yard가 있는데 우리로 치면 뒷베란다 정도가 되겠다. 근데 이게 창문이 없는 뻥 뚫린 경우가 많다. 뒷베란다로 나가면 정말 후끈한데 이곳에 헬퍼의 방이 있다. 주방이 이런 구조인건 아마도 주방은 집주인의 공간이 아니라 헬퍼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헬퍼가 밥을 하고 장을 보고 청소를 하는 게 일반적인 나라에서 나는 내가 모든 걸 하려다 보니 지칠 수밖에...

한국에서는 하루종일 움직여도 거뜬했고 자꾸자꾸 새로운 일을 만들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금세 지치고 만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싱가포르에서는 집에서 음식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를 이젠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호커가 이토록 많고 발전한 것도 연관이 있을터.

그래도 해외살이 초창기 때는 힘을 내어 열심히 바지런을 떨려고 애를 썼다. 한국에서 하던 거처럼 요리를 하고 콘텐츠도 계속 만들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스타로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싱가포르에서 8년을 살았고 지금은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더운 주방에서 8년 내내 밥 하다가 몸이 다 망가져서 지금은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나보고 너무 애쓰지 말고 쉬엄쉬엄 하시라고... 걱정된다는 글이었다. 그 글을 읽는데 순간 너무나 큰 공감이 되었다. 아.. 내가 그냥 체력이 약해진 게 아니었구나.. 그러고 나서 지인들에게도 주방일의 힘듦을 이야기했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은 헬퍼를 쓰지 않는 상황이다. 대부분 3~4년 있다가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고 언제 돌아갈지 정확한 기약이 없는 이도 남과 함께 사는 건 불편해서 주 1회 파출부 형식으로 헬퍼를 부르는 정도다. 같은 상황의 엄마들과 이야기하니 역시 나만의 체력 문제가 아니었다.


"설거지 한번 하고 나면 진짜 몸이 팥죽이야!!"

"밥 하고 나면 입맛이 없어 그냥 맥주나 한 캔 먹고 말아"

"한국에서는 주방에 라디오랑 티브이 달려있잖아 그게 그리워서 폰으로 영상이라도 틀어놓고 설거지했다가는

폰에 물이 다 튀어서 난리도 아니야.."

"맞아 싱트대가 다 너무 낮고 수전도 사방으로 물이 다 튀어서 그것도 못해"

"노동요처럼 고릴라디오나 들으면서 해야지 그거라도 없으면 너무 덥고 힘들어.."


다들 한국에서보다 주방일이 많이 줄고 외식이 늘었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다들 여전히 밥을 한다. 횟수는 줄었지만 더워도 국도 끓이고 찌개도 하고 곰탕을 끓이기도 한다. 되도록이면 간단 메뉴를 찾지만 한국입맛이 어디가랴. 더운 이 나라에서 더 지치지 않게 한국인의 밥심을 최대한 챙겨본다.




주방일이 힘들어졌지만 그 덕분에 미식을 탐험하는 경험이 늘었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고 먹다가 음식의 역사까지 찾아보는 우리 가족에게는 참 신나는 일이다.

원래도 먹으러 잘 다니는 우리 가족이었지만 주방이 날 지치게 한 덕분에 더 많은 관심사가 생겼다. 콘텐츠의 종류도 늘었고 현지인 맛집을 공유하며 브런치 연재도 하나 더 늘리겠다는 새로운 계획도 탄생했다.


이 나라에 살면서 힘든 일도 많지만 나에게 새로운 챌린지를 계속해서 날리는 곳이다. 남은 2년 동안 내가 이곳에 있는 경험을 최대한 잘 사용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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