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와 지원의 시간
2019년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전처럼 주활동은 서울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떠올려보면 그 때는 서울을 거의 매일 오고 가며 지냈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문화재단 청소년 TA(Teaching Artist), 무용 학원 스태프, 공연 준비, 움직임 트레이닝 등 그 때는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가 기차나 버스 막차를 타고 춘천에 오는게 대수롭지 않았다. 잠은 춘천에서 자지만 생활은 거의 서울에서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코로나 시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큰 경각심 없이 유행하는 독감 정도로 생각했었다. 수업을 할 때 마스크를 쓰고 하라고 권고하였지만 답답하고 말 전달도 잘 안 되서 수업 시작하고 10분쯤 지나면 마스크를 벗고 수업을 진행했었고 좀 있으면 지나가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2020년 2월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이라는 꽤 큰 작품에 무용수로 참가하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있었다. 2019년에 결혼식을 하였지만 신혼여행을 갈 상황이 아니어서 우리는 2020년 2월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짜 놓았었다. 코로나 분위기가 꽤 심상치 않았지만 무사히 공연을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마치고 바로 그 다음날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 다음 공연 팀은 슬프게도 관객이 없이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는 그게 시작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신혼여행을 가서 공연도 끝나고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가끔 접하는 인터넷 소식들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 마트나 잡화점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하면 다 품절인 상황이었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느끼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귀국하는 것이었기에 아주 잠시의 긴박감을 느꼈지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와서였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일상이 너무도 빨리 변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 때의 상황은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네이버 지도로 마스크 재고가 있는 약국을 체크하고 갈 수 없는 곳들이 점점 늘어나고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바뀌던 시기.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답답했지만 춤은 추었던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멈추면서 예술가에 대한 지원들은 평소보다도 늘어났다고 느껴졌다. 공연을 못하니 영상으로 촬영하기만 해도 활동 인정을 해주고 예전보다 많은 페이를 주기도 해서 방구석에서 춤을 추고 비대면 관련 활동을 하여도 어느 정도의 보상을 주었던 시기였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울에서의 활동이 줄어들게 되었다. 일단 사람 많은 곳을 가는 것이 위험했고 모이지 못하게 하였고 극장이나 연습실, 학원, 나중엔 카페까지도 긴급 조치로 통제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래도 생활은 유지해야 하니 지역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찾아보고 오히려 춘천에서의 생활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조금씩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조금씩 나누어보고자 한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초기에는 코로나에 걸리게 되면 동선 추적과 동시에 무척이나 죄인이 된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어떨 때는 확진자와 동선이 겹쳤다는 이유로 불안한 마음에 소규모 대면 공연을 갑자기 미루게 된 적도 있었고 다같이 코를 찔리기 위해서 긴 줄로 하염없이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기도 하였다. 다행이도 코로나에 계속 감염되지 않았고 백신 부작용도 크지 않아서 불안의 시기를 잘 지나가고 확진자 지원금도 주지 않던 2022년도에 코로나에 걸려서 1주일 격리를 하게 되었었다. 아프긴 아프구나. 이쪽 계통의 일이 그렇듯 출퇴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여서 격리 중에도 일은 조금씩 해야 되었었고 수업준비하다 잠들고 다시 교안쓰고 자고 일어나서 PT자료 만들고 하면서 잘 지나간 듯 하다. 마치 그 자체가 퍼포먼스가 된 듯.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며 우울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터널을 지나는 듯 했던 그 시기. 지금도 답답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건 비슷한 것 같다. 오히려 더 힘든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열거하기만 해도 힘들어 질 듯 하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무대에서는 멀어졌었고 그리고 다시 하게 된 공연들, 무대에서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할 수 없어서 집이나 카페, 서점, 야외 공간 등에서 인원수 제한을 지켜가며 한평극장이라는 공연을 진행했었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관객을 만나고 서로 교감하는 공연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춤과 공연은 계속된다. 사람이 있고 몸이 있다면 어느 곳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