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버라이닝 May 21. 2024

세상은 나를 응원해

원주민과 함께 한 공연

"사이판 여행 마지막 날 저녁 뷔페는... 야외 바비큐!"


3박 5일 여행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축제가 우리를 기다렸다. 그래, 여행 마지막날은 석양을 보며 바비큐를 즐겨야 제맛이지. 이번 여행 정말 제대로 즐긴다.


야외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했다. 기름진 고기 냄새에 시큼한 소스, 달달한 디저트 향까지 가득하니 비로소 파티에 온듯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소시지와 디저트를 가득 담아 오며 콧노래를 불렀다. 여유롭게 무대 바로 앞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데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머! 지금이야!"


서둘러 핸드폰을 들고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여행에 와 있는 동안 얼마나 정신없지 돌아다녔는지 매번 석양이 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마지막 날인데 그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후다닥 모래밭을 달려 바닥에 핸드폰을 푹 꽂아두고 셀카모드를 확인한 후 포즈를 취했다. 한 번 더 다다다 달려 타이머를 누르고 다시 아까 그 자리로 달려가서 이번엔 옆으로 앉았다. 석양은 단 몇 분 만에 하늘에서 총 천연색 무지개 춤을 추고는 쿨하게 퇴장해 버렸다. 테이블로 돌아와 보니 급하게 찍은 사진 치고는 꽤 그럴듯했다. 사진이란 게 참 이상해서 각 잡고 제대로 찍으면 오히려 어색해서 버리는 게 반인데 이렇게 후다닥 찍을 때 기대 이상의 멋진 순간을 잡곤 한다.


석양 사진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어느새 무대 위로 연주가들이 올라왔다. 하나둘 악기 앞에 자리를 잡고 댄서들까지 올라오자 곧 공연이 시작되었다. 폴리네시안 댄서들의 격정적인 춤은 나를 흥분시켰다. 이때부터 식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댄서들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골반과 다리만 격렬하게 움직이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문화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최근 훌라에 푹 빠져 있는 나에게 그들의 동작은 함께 하자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나도 저런 무대에서 춤을 춰보고 싶다!'


쉬는 시간이 되자 댄서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눈빛으로 내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댄서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그중 한 분이 나를 무대로 데리고 올라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너무 아무 저항 없이 웃으며 올라가서 누가 보면 예정된 참가자인가 싶었을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관객이 댄서와 팀을 이루어 춤을 추었다. 댄서가 보여주는 춤을 보며 따라 하는 미션이었는데 내가 꿈꾸었던 장면은 아니었지만 꽤 그럴듯하게 따라 했다. 잠시 꿈을 꾼 듯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박자를 맞추기 위해 악기 소리에만 집중했다. 확실한 건 내 입에서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시 기억이 끊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니 1등을 해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었다. 선물로 받은 생화 목걸이와 화관에서 진한 꽃향기가 흘러나와 온몸에 스며들었다. 수영을 하던 아들이 잠시 들렀다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상황을 설명하자 눈이 똥그래져서는 박수를 치며 '대박'이라고 외쳤다. 아들에게 화관을 씌워주고 목걸이를 걸어주니 신이 나서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벗지 않았다.


너무 흥분된 나머지 어지럽기까지 했다. 무대 위에 있을 땐 몰랐는데 오히려 내려오고 나니 손이 덜덜 떨렸다. 공연이 끝나고 댄서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건네며 박수를 쳐주었다. 방에 들어와서 거울 속 나를 보는데 이 모든 여행이 트루먼 쇼인가 싶었다.


'이상해. 세상이 너무 내가 잘 되길 바라는 것 같잖아.'


그랬다. 사실 세상은 나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잘 되기를 바랐다.


20주에 유산했지만 6개월 후 다시 임신했을 때,

등산 약속을 잡았는데 하루 전에 비가 와서 계곡의 맑은 물을 보며 등산할 수 있었을 때,

우연히 찾은 전시회에서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작품을 만났을 때,

훌라 지도자 과정에서 내가 추고 싶었던 곡을 배우게 되었을 때,

사이판 마지막 날 석양이 나를 기다려주었을 때,


수 없이 많은 날들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을 왜 못 알아들었을까? 낯선 곳, 사이판 무대 위에서 최고의 응원을 받고서야 귀가 뚫렸다. 이제야 들린다. 세상이 나를 응원하는 소리가.



이전 17화 인생에서 황제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