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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22. 2024

라임 나눔 합니다

모르는 사람의 친절 앞에서

"라임 나눔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새벽 비행기를 5시간 여 앞둔 시각.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어른들만 조촐한 파티를 열려고 소주 한잔에 과자봉지를 펼쳤다. 식구 중 한 명이 사이판 여행 온라인 카페 회원이었는데 갑자기 라임 나눔을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고 보여주었다. 같은 리조트 내 바로 위층에 있는 분이 여행을 마치며 짐을 정리하다가 고급 라임이 남아 아까워서 나누려고 한단다.


"라임 소주 먹을 수 있겠다! 얼른 댓글 달자."


신이 나서 얼른 댓글을 달고 시동생이 라임을 받으러 다녀왔다.


모르는 사람에게 라임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 묘했다. 고마운 마음도 있었지만 어색하고 불편하고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가져가든가 버리면 될 텐데, 왜 나눠주지?"


누군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면 의심부터 하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분주하게 라임소주를 만들어 마시며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비행기에 씨 있는 과일을 가져가면 안돼서 그랬나?"

"흠. 상한 건 아닌거 같아. 맛이 고급져. 버리긴 아까웠겠다."

"온라인 카페에 나눔 해서 고맙다는 글을 써주면 등급이 올라가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이유 없는 친절함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마음이란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받을 때마다 매번 의심과 자격지심이 함께 차오르곤 했다. 사람에게 정말 의도 없는 행동이 있을 수 있을까? 타인의 행동과 의도에 대한 불확실성은 늘 경계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베푸는 친절 앞에서는 경계심이 강해졌다.


'이 사람은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차라리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허탈하긴 하지만 속은 시원했다. 끝까지 속을 모를 땐 나도 받은 만큼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혼자 마음의 빚을 갚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예 모르는 사람의 친절은 무턱대고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는데도 계속 경계심과 의심을 품으며 잔을 부딪혔다.


"뭐지? 왜 나눠주셨을까?"


그때 식구 중 한 명이 말했다.


"에잇 몰라! 그냥 착한 사람인가 봐! 그냥 기분 좋아서 순간적으로 나누고 싶었을 수도 있지. 그나저나 진짜 맛있다."


고급진 라임 소주 덕에 고급스럽게 취해서였을까, 드디어 경계심에서 벗어나 불확실한 친절을 순수한 친절로 받아들이기로 모드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다만 감사는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 일단 후기를 남겨줘야지.


라임소주 사진을 예쁘게 찍고 고맙다는 후기를 정성껏 남겼다. 즐거운 여행 되라는 인사말까지 주고받으니 우리가 조금 더 교양 있고 성숙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재밌는 건 갑자기 우리도 뭐 나누고 갈 게 없나 한 번 둘러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워낙 알뜰한 데다 식욕이 왕성한 식구들인지라 안타깝게도 우리가 나눌 것은 없었지만 받은 마음을 그대로 안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아직 풀지 못한 그 마음을 조만간 어디에라도 꼭 풀어내야지.


문득, 딸이 5살 때쯤 나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엄마, 사람들이 계속 아이를 낳으면 세상은 언제 끝나?"


사람들이 계속 순수한 친절을 낳아서 세상에 친절이 끝나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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