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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23. 2024

행복하'당'

여행 오길 잘했어

"여행, 오길 잘했어!"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물놀이를 한 탓에 피곤에 지쳐 공항 의자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쪽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로 사이판 여행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여행짐을 챙길 때만 해도 왠지 모를 불안과 여른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느새 한껏 가벼워진 내가 보였다. 정수기 같은 무엇이 마음속 찌꺼기들이 걸러낸 게 분명했다. 이 긍정적인 마음을 또렷이 기억해 두고 싶어서 추억이라는 깔때기에 내 마음을 붓고 졸졸 흘러 내려오는 맑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붙잡았다.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흥분시키고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준비되고 예측 가능한 일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나의 새로운 모습과 만났고 놀랐고 반가웠다. 많은 순간이 느린 화면으로 움직이다가 한 번씩 멈춰 사진처럼 찰칵, 뇌리에 박혔다. 각 장면에는 '여행은 조식이지' , '순한 맛 행복', '훌라는 자유'처럼 특별한 이름이 붙여졌다.


사이판의 자연에게 단순함과 겸손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배웠다.


복잡하고 빠른 것보다 단순하고 느린 것이 주는 비어 있는 시공간의 매력을 한껏 즐겼다. 처음 멈췄을 때는 관성 때문에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곧 느린 속도에 익숙해졌다. 자연은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주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고요하고 깊은 바다는 변해야 산다고, 나아져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나를 몰아세우던 나의 지난 시간들을 꿀꺽 삼켰다. 푸름이 분홍으로 변하는 석양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오롯이 '나'로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지만 잠시 '엄마, 딸, 아내, 며느리, 영어학원 원장'이라는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났고, 책임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가벼워졌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아주 얇고 가느다란 '어느 존재’에 불과했다. 그냥 있음 그 자체인 사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고 지나치는 인연이기에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가볍고 뽀송한 관계. 일시적이지만 때로는 이런 가벼운 관계가 필요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와의 대화 시간을 꽤 확보했다.


누군가를 신경 쓰느라 나를 가면 뒤로 가릴 필요가 없었다. 해야 할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 내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지 한번 더 스스로에게 묻고 확인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지만 일상에 치여 모르는 척 지나가야 했던 마음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이 생긴 마음들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각자의 섬을 만들고 둥실 떠올랐다. 그 섬들에서 나의 지난 마음들도 모두 불러내 알아봐 주고 토닥여주고 놀아주었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했다.


최근 가장 많이 들은 말 두 가지는 ‘마음 챙김'과 ’ 에너지관리'이다. 모두 과거나 미래를 향한 부정적이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행복을 알아차리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다른 공간에 있는 가족들과 다른 시간을 살았던 내 모습이 겹쳐지면서 생각이 복잡했지만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 조금씩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생각과 감정, 신체 감각에 더 주의를 기울였고,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사이판이 아니었어도, 여행 멤버가 달랐어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일상에서 분명 '여행'이라는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판이어도 좋고 제주도도 좋고 익선동, 성수동도 좋다. 서울이 아니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지가 되어 줄 수 있다.


잠시 일상의 루틴에서 각도를 틀어 그곳만의 풍경이 주는 생경함에서 아름다움을 만나고 위로를 받자. 나 이외의 역할을 내려놓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1시간이어도 충분하다. 그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의 손을 잡고 나만 바라보자.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아파트 밖 도로의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사이판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낮이면 마나가하 섬의 더운 바닷바람이 생각났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엔 일 년 정도 일을 쉴 계획이었는데 여행을 다녀오니 다시 일하고 싶어졌다. 에너지가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여행이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되어 내 마음의 잔을 채워두었나 보다. 호로록. 빨대로 한 입 들이마셔 당을 채우고 일상으로 점프한다. 이 당의 이름은 행복하'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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