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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20. 2024

인생에서 황제되기

나만의 황제수영장 찾기

"황제 수영을 즐기셨군요!"


리조트에서 혼자 수영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 SNS에 올렸더니 지인이 댓글을 달았다. '황제수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지만 언제 쓰이는 표현인지 짐작이 되었다. 혹시 몰라 검색해 보니 우연히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타이밍에 혼자 수영을 하게 될 때 그 행운을 '황제수영'이라고 표현하는 듯했다.


'혼자 수영해 본 적이 언제더라?'


매번 눈치게임에 실패해서 휴일에 내가 가는 수영장만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물 반, 사람 반'인 물속에서 발차기는 절대 불가능했고 몸을 일자로 펴는 행동은 민폐 그 자체였다. 얼굴만 물 밖으로 내밀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물속에서 하루 종일 걷기만 하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식당에서도 사탕에 몰려든 개미떼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동네보다 두 배 비싼 떡볶이와 짜장면을 먹곤 했다. 그래도 즐겁다는 아이들을 보며 매번 같은 실패를 반복했다.


여행에 와서 누릴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누리자고 다짐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리조트 수영장이 문을 열자마자'와 '수영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두 가지 기회에 모두 도전했고 두 번 모두 '황제수영'을 누렸다.


여행 일정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부지런히 수영 준비를 했다. 아직 열지 않은 리조트 수영장 앞을 산책하며 준비운동을 했다. 땡! 직원들이 들어오자마자 달려가서 타월을 받고 입장 팔찌를 찼다. 밤새 눈이 내린 길을 제일 먼저 밟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가장 좋아하는 풀장을 찾아가서 풍덩! 뛰어들었다. 사이판의 온화한 날씨 덕분에 오전 9시경의 수영장 물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깨끗하고 적당한 온도의 물, 우리 식구들 외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드디어 몸을 쭉 뻗어 수영을 했다. 마음껏 발차기를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그렇게 약 한 시간동안 그야말로 황제놀이를 했다.


저녁을 먹고 새벽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밤에도 수영을 한 번 더했다. 리조트 폐장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소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우리 식구들만 그 큰 수영장에 남게 되었다.  밤수영은 특히 살이 탈 걱정이 없어서 더 자유로웠다. 뜨거운 햇빛이 두려워 낮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배영을 실컷 하며 별을 감상했다. 아무도 없으니 아이들이 마음껏 다양한 물놀이를 도전한 덕분에 잠깐 사이에 수영과 잠수 실력이 늘었다. 그래 봐야 작은 풀장 안이었는데도 그곳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시간 동안 리조트 전체를 가진 듯한 풍요로움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황제'가 되는 법은 참 간단하다. 혼자 새벽에 조깅을 하거나 산책만 해도 동네가 다 내 땅인 듯 느껴진다. 그 순간만큼은 나무와 풀이 내가 사는 집 마당에서 자라는 것만 같다. 바람도 이슬도 새도 다 내 소유다. 주말에 골목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모습과 목소리의 잔상이 남아 있는 곳을 평일에 혼자 조용히 지나갈 때도 묘한 자유로움과 특권을 느낀다.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볼 때도 그 태양을 내가 잠시 가진 듯하다. 모두 내가 황제가 되는 순간들이다.


우울이나 짜증이 에너지를 떨어뜨리거나 문득 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나만의 황제수영장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인 듯한 느낌이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걸 알았으니까. '황제수영'과 같은 작은 사치들이 분명 내 무거운 삶을 가볍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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