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오해와 하나의 진실
2년 넘게 다니던 PT샵을 졸업하고 새로운 곳을 찾았다.
그곳엔 피부가 하얀 요정, 까만 요정, 머리가 꼬불꼬불한 요정, 그리고 이름은 미니지만 메가 힙을 가진 대표 요정, 인기 스타 벨루 아버님까지 요정과 캐릭터가 공존하는 세계였다.
“안녕하세요!”
키가 작은 요정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작은 체구와 달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인바디를 재고 상담 테이블에 앉았다.
엘보우 통증이 심해진 후 운동량도 많이 줄었고, 연말이라 술도 꽤 마신 터라 괜히 눈치를 보며 앉았는데, 그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인바디는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정말 열심히 운동하고 관리하셨어요. 나이가… 48… 어머, 진짜 최고예요 회원님!”
휴, 다행이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질문.
“주량은 얼마나 되세요?”
나올 게 나왔다.
지난 PT샵에서도 첫 상담 때 “술은 절대 못 끊어요. 샘 , 술 마시면서 관리하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당당히(?) 선언하며 주기적인 허락을 받아왔던 나다.
이번에도 커밍아웃을 해본다.
“주 2~3회 마시고요, 주량은 소주 두 병 정도요. 샘, 저 술은 진짜 못 끊겠어요.”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네 회원님,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으시면 계속 그렇게 드시면 되고요.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싶으시면 줄이셔야 해요. 꼭 드셔야 하는 날 아니면 안 드시는 건 어떠세요?”
망했다.
그렇게 쫄린 상태로 수업을 시작하고, 그녀와의 첫 하체를 경험한다.
기존과 달리 고립운동 위주의 루틴. 느려진 템포에 돌아버리기 직전. 너무 힘들어서 쉬는 시간을 길게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의 한마디.
“근력은 있으신데 근지구력이 좀 부족하시네요. 엄살도 있으시고… 연기도 하시고.”
진짜 망했다.
나의 새로운 샘이 쌉티라니.
대문자 F의 엄살은 이제 혼자 삼켜야 하는 걸까.
여원샘, 그녀는 누구인가.
추리 1. 그녀는 쌉티.
—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 멀리 기구 사이로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
아직 어색한 나는 작게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한다.
“으하하하하!”
웃음소리마저 장군감이다.
힙 운동 중 자극이 와서
“으악! 샘 왔어요!”라고 외치면
“어서 오세요!”
더 큰 소리로 기합을 넣어준다.
운동할 때는 더 군인 같다.
어떤 동작이든 칼각.
추리 2. 그녀는 군인 출신.
—
“오늘은 데드리프트를 해보겠습니다!”
드디어.
내 사랑 데드리프트를 그녀와 함께하다니, 설렌다.
하체와 상체를 부드럽게 연결해 당기고, 힙에 자극이 확 들어오는 방식.
연습해서 얼른 무게를 치고 싶다는 내 속마음을 읽은 걸까. 경고가 들어온다.
“자꾸 무겁게 하려고만 하지 마시고, 가벼운 무게로 자세 연습 많이 하세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렉에 쿵쿵 치고 튕기는 거… 그건 300킬로 이상 들 때만 인정입니다.”
그랬다.
그녀는 요란 떠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
그래서 퍼블릭 헬스장에서 딱 붙는 탑이나 레깅스보다 헐렁한 오버핏 밀리터리 셔츠를 입는 사람.
그러고 보니 대회 준비 중이실 텐데 티를 내지 않는다.
“샘, 지금 대회 준비 중이시죠? 안 힘드세요?”
“대회야 뭐, 운동하다가 일하다가 대회 날 다녀오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도 조용히 대표님께 보고하고 다녀왔어요. 대회 나간다고 요란 떨 거 뭐 있나요! 저 사실 꼰대예요. 으하하하!”
추리 3. 그녀는 진정 꼰대인가.
—
어느덧 그녀와 수업한 지 4개월.
나의 추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는 다행히 쌉티가 아니라,
나의 운동 열정을 이해해 주고 본인의 수술 경험을 바탕으로 내 통증에 깊이 공감해 주는 울트라 F였고
군인이 아니라 체대 졸업생으로
과 CC 남친과 무려 10년 연애 후 결혼을 준비 중이며,
알고 보니 ‘여원둥이‘라는 세상 귀여운 별명을 가진,
귀여운 꼰대였다.
—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프로다.
스포츠 모델, 비키니를 거쳐 핏모델까지.
모든 종목을 섭렵하고 작년에 핏모델 프로카드를 획득한 그녀.
하지만 그녀의 ‘프로’는 단지 종목에만 있지 않다.
수업도 프로.
칭찬도 프로.
내 인스타 피드를 고려해 카메라 무빙에 줌 인·아웃까지 챙기는,
촬영도 프로.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조용히, 묵묵히 해내는 전차 같은 사람.
사랑니가 어금니를 밀어 염증이 생겨 얼굴 한쪽이 퉁퉁 부었는데,
“마침 코로나라 마스크 써서 안 보였어요.”
라며 해맑게 웃는 사람.
—
최종 결론.
그녀는 누구인가.
프로 중의 프로.
—
그런 그녀가 수업을 시작한 지 서너 번쯤 되었을 때,
조용히 제안했다.
대회, 생각해 본 적 없냐고.
이미 몸을 잘 만들어놓아서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어보고 싶다고.
그녀의 겸손한 표현은
나와 내가 지나온 시간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고마웠고, 설렜다.
대회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언젠가,라는 막연한 시기.
다만 그때가 오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다짐.
그래, 지금이 그때라면
정말 최선을 다할 시간이 드디어 왔다.
—
얼마 전, 미니메가 대표님이 말했다.
내 몸이 점점 그녀와 닮아간다고.
그 말에 괜히 가슴이 뛰었다.
그 안에, 그녀의 ‘프로 근성’까지 닮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