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은 작은 무게엔 인사하지 않는다

흑화한 엉덩이

by 실버라이닝


주사 맞을 때만 잠깐 인사하고 사라지는

두 개의 슬라임.

늘 흘러내리며 의자의 표면에 자신을 맡기던

두 덩어리.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았다 일어나면

양옆으로 평등하게 퍼지는 볼기살.

결국 남는 건 뼈의 존재감뿐.

일어나면

닿았던 부분만 유난히 빨갰다.


청바지를 입으면 더 명확해졌다.

힙은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똥배와 허벅지만 존재감을 과시했다.


초딩몸매.

남편은 그딴 걸 애정표현이라며

나를 놀렸다.


믿었다.

힙은 타고나는 거라고.


눈, 코, 입처럼

힙도 이미 엄마 뱃속에서 결정된 거라고.

외쿡언니 같은 힙은 이번 생엔 불가능하다고.


여자들의 가슴근육처럼

근육보다 지방이 많은 부위라고 생각했는데


운동을 시작하고,

인스타그램을 보다 보니

세상이 조금 수상하다.


어랏?


레깅스 위로 단단하게 솟아 있는 힙들.

찰랑이는 게 아니라, 튕겨 나올 것 같은 탄력.


“저게… 진짜야?”


운동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들.

힙 근육은 꽤 큰 근육에 속하며

운동으로 크기를 키울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일화들.


의심했고,

부럽다가,

문득 생각했다.


잠깐,

그럼 나도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나는 3년 법칙을 믿는다.

3년이면 뭐든 변한다는,

힘든 시작을 버티게 해주는 나만의 신념이다.


그래서

하체를 좋아하기로 했다.


레그프레스

브이스쿼트

런지

불스스

백익스텐션

힙스


타협하지 않기,

고통을 참고 즐기기.


피하고 싶은 운동들을

이제는 내 힙으로 친히 마중 나가리.


물론 내 몸은 계속 협상을 시도했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네. 상체 할까?”

“무게 칠 상태가 아닌데 자극 위주로 갈까?”


하지만 그런 날이면,

운동 끝에 내 몸이 먼저 알았다.


가벼운 무게는 친절하고 자상하다.


대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힙은 작은 무게엔 인사하지 않는 법.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한 거 같은데?”

“오버하다가 다칠 것 같은데?”


그 질문에

힙은 단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


개수를 채우고 무게를 올릴 때야

비로소

저 멀리 문틈 사이로 내미는 힙의 그림자.


힙과 인사를 하기 위해


눈을 뜨면 메모장에 루틴을 적고

목표 무게를 적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운명처럼 만난 아이.

스탠딩 아웃 타이.

(읽을 때 라임 살리기)


자세만 잡았는데 느낌이 왔다.

쓰나미가 오기 전의 고요함 같은.


힙쓰러스트 네 세트를 하고 바로 들어간 날이다.

자세를 잡는 순간,

엉덩이인가 돌덩이인가.


곤장 백 대를 맞은 듯 힙이 퉁 튀어 올랐다.

말벌이 정확히 거기만 알고 찌르고 갔나.

전자침처럼 전류가 흐르는 통증.


“와… 씨. (자극) 미친 거 아니야?”


너무 확실한 인사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채 샘과 눈이 마주치자

지금 눈으로 욕하신 거냐며

욕해도 되니까 자세만 제대로 잡고

끝까지 하라고 한다.


독한 양반.



그날 다시 확인했다.


힙은

느리게, 무겁게, 끝까지 노크해야

비로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마지막 세 개.


그 지점에서

비로소 말을 건다.


오셨군요.

네, 안녕하십니까.


다만 그날,

힙만 깨어난 게 아니었으니


내 안의 또라이도 기지개를 켠다.


끝까지 하겠다는 전사와

도저히 못 하겠다는 진상

두 개의 자아가

계속 싸우기를 반복하다

고통에 소리치다 웃으며 낳은 아이.


하…하하하… 으하하하….


더 이상 눈으로 욕할 힘도 없이,

모든 혈류가 힙으로 몰리는 순간

힙은 박동하는 두 개의 심장이 되고


마지막 세트에서 온 힘을 털어낼 때


바로 그때.


힙은 더 이상

예전처럼 착하지 않고

검붉게


흑화한다.



하체 운동 후,

흑화 한 힙을 데리고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


아무도 안 보는데

혼자 힘주고,

혼자 의식하고,

혼자 웃는다.


그리고 혼자 칭찬한다.


“그래 나 오늘 대충 안 했어. 청바지, 너는 알지? “



-

그렇게 오늘 내 알통엔 검붉은 복숭아 씨앗 하나가 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