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보면 그 위를 뒹굴며 막춤을 추던 럭키와 애보가 생각난다. 개들이 눈에 흥분하는 이유가 색 때문일까 아니면 촉감 때문일까 궁금하다.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럭키를 처음 만난 때가. 어느 비 오는 날 아버지가 학교에서 돌아와 나를 조용히 부른 다음 아버지 도시락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 안에 작은 강아지가 있었는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럭키는 내 품에서 강아지 시절을 졸업했다. 흔히 말하는 잡종개(똥개)였지만 내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럭키는 큰 개가 되면서 어른들에 의해 마당으로 쫓겨났다. 가죽 목걸이가 채워져 마당 한편에 묶여있다 제한적으로 자유가 허용되는 처지가 되었다. 낯선 사람이 기웃거리면 컹컹 짖어대는 집 지키는 개, 대문에 써 붙이는"개조심"문구 속의 개가 되었다.
1년 후 애보가 우리 집에 왔다. 애보는 족보(무슨 상장 같은 것에 영어와 한글로 가득 적혀있었다)가 있는 셰퍼드 순종이었다. 생후 30일 된 강아지여서 역시 내 품에서 자랐다.
나는 마당에 있는 럭키에게 미안해서 럭키도 자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었는데 어른들(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은 그렇지 않았다. 럭키를 막 대하고 구박하는 것 같았다. 출신을 구별해서였는지 당장 귀여운 것이 우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혼자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를 규명하기에는 어른들이 너무 바빠서 마주할 시간이 없었고 내가 가족 안에서 말발이 있지도 않았다.
럭키는 성품이 따뜻한 아이였다. 운동부족으로 살이 찐 상태였는데 그 살찐 몸으로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향해 트위스트 춤을 추며 환대를 해 주었다.
애보는 럭키보다 훨씬 오래 함께했는데도 내 기억 속에 럭키만큼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애보는 나보다는 외할머니와의 교감이 더 깊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럭키와의 이별이 어린 내게 큰 상처로 남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럭키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개장수에게 팔았다고 했다. 여름이면 개장수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개를 사 가지고 가서 보신탕을 만들어 팔고 심지어는 주인 몰래 훔쳐가는 일도 빈번했다.
보신탕이라는 음식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고등학생이 다 되어서였으니 럭키가 없어진 그 시점에서 슬펐던 건 이별 그 자체였다.
어른들은 사람 먹기에도 쌀이 부족한데 개 두 마리를 먹이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이유를 댔고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럭키를 지킬 수 없었다.다만 이별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이 상처로 남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일을 무심하게 행한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에게 수없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다.
애보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고 딱 한 번 4마리의 강아지를 낳았는데 키케,키코, 키니,키로라는 예쁜 이름이 역시 상장 같은 족보에 적혀 있었다.
어느 날 가출하여 돌아오지 않아 온 가족이 찾아 헤맸다. 슬픈 가족들은 애보가 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사라졌다고 믿기로 했다. 애보와의 이별도 슬펐지만 이미 나는 세상 때가 묻은 반 어른이어서인지 이 이별이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