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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Oct 05. 2021

그리운 시절, 그리운 당신

Bravo, my life!(21)

대필작가의 말

할머니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묶어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계실 때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더라면 여쭤볼 말이 참 많았을 텐데, 하는 것이 여전히 아쉽네요. 텔레비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도 들었는데, 동네에 당시 텔레비전이 딱 한 대 뿐이었고 엄청 귀해서 평소에는 따로 수납장을 만들어 보관하셨었다고 하더라고요! 수납장 째로 들고 가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던 제게 그건 엄청 무겁고 튼튼해서 괜찮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겪어 보지도 못한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내와 결혼 후 열몇 번의 이사를 했다. 군대에 몸담은 이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리라. 익숙해질 만하면 낯설어지는 생활이 힘들 법도 했지만 그네는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다. 서울 태생이라 나긋나긋한 말씨에 얼굴도 예쁘고 태도도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웃 여자들 중에는 말수가 많고 남의 일에 참견하다 말다툼을 하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말씨는 적었지만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니 같은 또래 부인들은 물론이고 노인들도 모두 좋아했다.


 아내는 바느질 솜씨도 좋았다. 애들 배냇저고리도 만들어 주고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신부 신랑 한복도 공짜로 만들어 주곤 했다. 양주 읍내 살 때 주인아주머니가 근처 사는 총각 결혼식 한복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지어서 선물한 적도 있다. 아주머니의 주인 양반은 나와 항렬이 같아 형님으로 모셨기에, 그 가족과는 더 각별했다. 내외가 날 볼 때마다 입을 모아 어떻게 저렇게 예쁘고 훌륭한 색시를 골랐냐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다. 부평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는 마을 어귀까지 나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아쉬워하셨는데 그 이후로 만나 뵙진 못했다.


 부평에 이사를 간 첫날밤엔 어린 큰 딸이 연탄가스를 마셨다. 지금이야 TV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땐 참 흔한 일이었다. 다행히 빨리 발견해서 방문을 열고 김칫국물을 마시게 했더니 나았다. 부평에서 얼마 안 있다가 포천으로 이사했는데 여기 주인집 아주머니도 아내를 무척 좋아했다.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건가 싶었다. 포천에서 1년 정도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하게 됐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굉장히 서운해하시면서 아이 용돈과 우리 가족 여비를 두둑하게 챙겨 주시기도 했다. 비록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좋은 분들을 만나서 그런지 팔도강산이 다 내 집 같고, 짧은 기간이어도 정이 담뿍 들어서인지 떠나는 날이면 동네 구석구석이 눈에 밟혔다. 아내가 선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진심을 알아준 인정 많고 따뜻한 분들을 만났던 것은 우리에게 큰 복이었다.


 부산에서 병기 교육을 받은  서울을 거쳐 덕정에 터를 잡았을  큰아들이 태어났다. 큰아들은 지금도 인상이 좋지만 어렸을 때는 얼굴이 희고 뒤통수가 넓적하여 굉장히 예뻤었다. 당시에는 전화가 많지 않아 아들 목소리를 자주 들을  없어 안타까웠는데, 눈이 수북하게 쌓인 겨울날 장모님과 아내가 큰아들을 택시에 태우고 부대를 깜짝 방문했다. 눈물 나게 반갑던  마음을 말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그때 나를 보며 웃던  사람의 모습은 지금도  눈송이처럼 환하고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도랑이 있는 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큰아들이 새 옷을 입고 그대로 도랑으로 돌진해 옷이 흠뻑 다 젖었다. 새 옷은 엉망이 됐는데 아이는 좋다고 깩깩 소리를 질러대고, 싫은 소리를 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아내가 웃으며 도랑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주저앉아 물장구를 쳐대는 아이를 번쩍 안고 방으로 가서 정성스레 닦이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조곤조곤 타일렀다. 딴 엄마들 같으면 화를 내면서 엉덩이라도 한 번 때려 줄텐데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귀한 자녀일수록 엄하게 키워야 한다고들 했지만 아내는 아이들이 잘못을 해도 소리 지르거나 손찌검하는 일이 없었다. 간혹 자기 기분이 나쁘면 아무 잘못 없는 애들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도 있을 법한데, 아내는 자신의 감정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아내의 희생과 헌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애들은 잦은 전학과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다 올바르게 자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도 힘든 순간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을 물어보고 어루만져 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자기를 위해서는 돈 한 푼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서는 살뜰히 모은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척척 내어주던 아내. 미국에서 탄약 검사관 교육을 받고 귀국할 때 그네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 꽤나 고심했다. 그러다 가방과 화장품 50불어치를 좋든 싫든 써보라고 사 왔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제니스 텔레비전을 사다 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귀국한 달인가 그다음 달부터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다. 우리 집 하꼬방은 동네 아이들의 텔레비전 소극장이 되었다. 김일의 박치기, 아폴로 호의 달 착륙 등 굵직한 볼거리가 있을 때는 담 너머로 온 동네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통에 텔레비전을 잘 보이도록 마루에 내놔야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 집을 들어서는 골목 어귀부터 시끌시끌한 함성과 웃음이 넘쳐났다. 가진 것 없어도 정답고 마음 따뜻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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