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번외)
대필작가의 말
- 이야기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특별히(?) 여쭤보아 들은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할머니와의 첫 만남인데요.
사실 저희 할아버지도 여느 할아버지들처럼 할머니께 애정표현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할머니 사진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모습이나 예전에 할머니께 보내셨던 편지들을 보면서 알았지요. 요란하게 티 내신 적은 없어도 그 또한 사랑이었구나. 아주 깊고 깊은.
이번 글은 정리하면서 저도 모르게 많이 울었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할머니는 정말 그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러 온 걸 모르셨을까요? 할머니도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맘에 드셨는지, 왜 그렇게 방긋방긋 웃기만 하신 건지...
지금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네요. 그래도 할아버지를 통해서라도 들을 수 있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세기의 로맨스는 아니지만 어떤 두 사람의 인생에서는 최고였던 사랑 이야기.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1951년 여름이었다. 과일 팔러 자주 오시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것저것 말을 걸더니 대뜸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아는 집 색시가 있는데 소개해 줄 테니 장가가겠냐고 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좋은 색싯감만 있으면 가지요, 했는데 며칠 뒤 아주머니가 그 색시의 셋째 오빠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며 날을 잡아왔다. 얼떨결에 청구동 쪽에 가서 셋째 오빠라는 분을 만나게 됐다. 수더분하고 서글서글하니 인상이 좋은 분이어서 호감이 갔다. 며칠 있다가 과일장수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색시 한 번 만나보겠느냐고 물었다. 만나보고는 싶은데 조금 쑥스럽기도 해서 먼발치에서 오가는 것을 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그 집이 시구문(현 광희문) 앞에서 쌀가게를 하니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작정하고 하루 날을 잡아 시구문 쪽으로 갔다. 쌀가게 간판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가는데 한 여인이 쌀가게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 여인이 내가 소개받기로 한 사람임을 알았다. 맵시와 걸음걸이가 괜찮았고 얼굴 생김이 점잖았다. 쌀가게 쪽을 느리게 지나가며 흘긋 보니 그 여인은 내가 지나치는 걸 아는 것 같은데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행동이 아주 양반 티가 났다. 양친 슬하에서 곱게 자라서 그런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군인들의 부인을 많이 접했다. 그중에는 훌륭하신 분들도 있었지만 간혹 남편보다 더 나대거나 남편을 깔보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군인 가족들이 모여서 살다 보니 남편의 계급이 자기 계급인 양 행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모습을 보아 왔기에 얌전하고 점잖은 여인에게 첫눈에 마음이 가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과일 장수 아주머니가 다시 오셨다. 색시가 어떠냐고 묻기에 솔직히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쪽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넌지시 물었더니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내가 이쪽에 친척이 없는 것이 큰 흠이라고 했다. 전쟁 통에 부모님, 누님들과 헤어져 혈혈단신 남한으로 오게 된 것이 내 탓은 아님을 그분들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애지중지 키운 딸을 부평초 같은 사내에게 선뜻 주기가 망설여지는 마음도 이해가 됐다. 아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에 큰 용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어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용을 보았으니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그날 과일 장수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여인의 어머니가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소를 받아 찾아갔는데 문득, 대문 앞의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박쌍용(朴雙龍). 갑자기 어제 꿈속에서 본 용 두 마리가 생각났다. 우연치곤 대단한 인연 같았다. 방에 들어가니 여인의 부모님과 두 오빠, 언니가 앉아 있었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데 마치 구두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면서 이왕 왔으니 서로 얼굴이라도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얼마 전 몰래 보아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만나자니 다시 긴장이 됐다.
건넌방으로 갔더니 여인이 혼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자리를 권했다. 앉긴 했는데 둘 다 멀뚱멀뚱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이나 앉아있던 것 같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 식은땀이 나는데 그네는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나는 3일 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나눈 말은 거의 없었지만 느낌이 괜찮았다. 3일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잘 있었느냐는 인사만 건네고는 서로 또 말이 없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짧은 시간 봤지만 나는 댁이 참 좋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네는 또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집안 어른들이 알아서 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바로 그다음 날, 1951년 11월 1일로 기억한다. 과일 장수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그 집에서 3일 후에 약혼하자 한다고 알려주셨다. 집안 어른들이 좋게 봐주신 모양이었다. 좋으면서도 얼떨떨하니 정신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사주단자를 사서 색시 저고릿감과 금반지, 시계를 넣고 그 안에 내 생년월일을 써서 보내야 한다며 꼼꼼히 일러주셨다. 그날은 사주단자를 마련한 뒤 원주로 보급품을 실으러 갔다. 원주에 도착하니 또 다른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일등 상사로 진급한 것이다. 약혼에 진급까지, 인생에서 큰 두 가지 행운이 잇달아 찾아온 날이었다. 이런 날 부모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니 문득 서글퍼졌다. 그래도 이 또한 부모님이 돌보아 주신 덕분이겠거니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과 함께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이후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처가에 놀러 가곤 했다. 결혼식은 이듬해 봄, 동대문 앞에 있던 경전 예식장에서 올렸다. 결혼할 때 감사하게도 피로연과 결혼 비용을 처가에서 다 부담해 주셨다. 그렇게 월 35만 원 셋방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넉넉하진 않았어도 서로 위해주며 살뜰하게 살았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사람은 사계절을 겪어 봐야 안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첫눈에 인연임을 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고,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