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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Sep 22. 2021

그 시간, 함께 했던 우리

Bravo, my life!(20)

대필작가의 말     

 글을 정리하다 보면 저는 특히 할아버지가 만나셨던 사람들 이야기에 흥미가 동하더라고요.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긴 하지만, 전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조우할 확률을 생각해 보면 정말 특별한 인연이잖아요!


 저 역시, 멋진 풍경보다도 사람들 때문에 여행이 그리워지곤 하거든요. 올레길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으며 막걸리를 기울였던 제주도의 신혼부부, 매일 다른 숙소에서 기적적으로 만나 저녁을 함께 먹던-나중엔 아예 제 밥까지 차려놓고 기다리시던-산티아고 길의 할아버지 4총사 등등. 물론 그때 그분들을 다시 그 시간과 장소에서 만날 수 없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인연이란 소중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왜 그렇게 미국을 그리워하셨는지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고 보면 매일 마주치는 회사나 학원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가 싶어요. 대단한 확률로 지금 이 순간 지구별 여행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조금 더 소중하고, 다정하게 대해야겠습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군에서 교육 받으실 당시(한국) 사진을 두 장 첨부해 봤습니다.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건지 할아버지가 한 번에 보이더라고요…

(사진 한 장은 연도가 단기로 써 있는 게 특이하네요)





  

1.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아는 분이 여기 안창호 의사의 아들인 필립 안이 살고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타지에서 만나는 한인이면 누구든 반가울 텐데 같은 성씨, 게다가 안창호 의사의 아들이라 하니 당장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당시 필립 안 씨가 운영하던 '문게이트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배우로도 출연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반갑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자기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다. 수영장이 딸린 꽤 큰 집으로 들어가니 안창호 의사의 부인이신 이혜련 여사가 앉아 계셨다. 일단 큰절을 올리고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여사께서는 매우 반가워하시며 안창호 의사는 물론 미국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혜련 여사의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나라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분이 계셔서 지금 우리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는 거구나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 여사는 수박 한 통을 다 썰어서 먹고 가라고 내주셨는데 귀하게 내주신 것을 남길 수도 없어 배가 몹시 부를 때까지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필립 안 씨의 형제들도 잠깐 보았는데 어머니를 극진히 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2.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 학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차를 몰고 오더니 학교 들어갈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자기도 가는 길이니 타라고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온 초등학교 선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꽤 친절했다. 집도 가까운데 매주 자기 집에 오면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 집에 가보니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고양이 상처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는 헌병 상사 하나가 그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기에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안 만났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녀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순수한 의도였는지는 영영 수수께끼로 남았다.



3.

 미국의  도심에서는 경찰 2명이 1조가 되어 순찰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조금은 험상궂게(?) 보였지만 꽤나 친절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잃어 경찰에게 물었더니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적도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걸핏하면 불심검문을 했는데 미국에는 그런  없었다. 그런데   , 시카고에서 이면구라는 분과 시내 구경을 나갔다가 검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맥주홀에 가서 맥주를 먹으려는데 사람이  차서 주문을 못하고 뒤에서 우물거리고 있었더니 누가 와서 말을 걸었다. 사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였는데 무슨 일이냐고 하니 자기 패스를 보여주는데 사복 경찰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도 패스를 달라고 해서 확인하더니 고맙다고 하고는 인파를 뚫고 맥주를   주문해서 우리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경찰에게 맥주를 얻어먹게 됐는데 공짜라 그런지 더욱 맛이 있었다.



4.

 1967년, 두 번째로 미국 일리노이 주에 가서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아는 사람이 자기가 잘 아는 주 의원 하나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시내의 간이식당에 들어가니 신사 한 사람이 혼자 앉아서 햄버거와 커피를 먹고 있었는데 지인이 오더니 “저기 저 사람”이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의원들 같으면 그런 작은 식당은 가지도 않을 뿐더러 오더라도 수행원을 여럿 데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선거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애로사항은 없는지 등을 물었고 나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쯤 되면 이런 조그만 식당에는 발도 안 들여놓을 텐데 당신을 보니 부럽다고 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는 가족 이야기부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주제들로 30분가량 대화했다. 나중에는 그가 주 의원이 아니라 그냥 동네 친근한 아저씨처럼 보였다.

 헤어질 때 그는 내게 선물하려고 'blue book'을 가져왔다면서 책을 꺼내 즉석에서 서명을 해 주었다. 일리노이의 정책, 산업은 물론 다양한 정보가 있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서로 악수하고 헤어지는데 기분이 묘했다. 무엇보다 주 의원이라는 사람이 동네 식당에 와서 몇 달러짜리 점심을 그것도 혼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먹고 가는 모습이 가장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이런 것이구나. 소위 말하는 '높은 사람'의 권위 없고 소탈한 모습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격한 부러움을 느꼈다.



5.

 애니스턴 앨라배마에서 현장교육을 받을 때의 일이다. 시내 구경을 나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척추 지압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꽤나 친해져 자주 만났는데 그분은 나를 집에 초대하거나 차로 시내 구경을 시켜주고, 골프장에 데리고 가서 골프를 가르쳐 주는 등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늘 자기가 도와줄 게 없냐고 묻고, 무언가 도와주고 싶어 고심하곤 했다. 집에 간다고 했더니 애들 갖다 먹이라면서 100개 들이 비타민을 20봉지나 주기도 했다. 탄약 검사 교육을 갈 때 이미자 음반 세 장을 집으로 부쳐 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며 졸업하고 갈 때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고 했는데, 그 이후 영영 가지 못했다.



6.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수업이 없어 시내를 구경하러 나가곤 했다. 우연히 한 상점에 들어갔다가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주인과 친해지게 됐다. 우리는 매주 시카고 외곽에 있는 차 경매장에 함께 나갔다. 경매장에서 산 중고차를 손질해 팔고 또 사 오는 게 그의 일이었다. 경매장에 가면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었지만 우린 차를 사서 보내고 오는 길에 또 늘 무언가를 사 먹곤 했다. 오늘은 무얼 먹을까, 둘이 즐겁게 의논할 때면 왠지 군것질을 찾아 기웃거리는 까까머리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때 처음 미국 피자를 먹어봤는데 고기가 많이 들어있고 뿌려 먹는 가루 종류도 다양해서 아주 맛있었다. 플로리다에서 가져왔다는 오렌지도 맛이 굉장히 좋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돈도 많고 인정도 많았다. 하루는 내가 ‘너는 언젠가 록펠러와 같은 부자가 될 것 같다’고 했더니 아무나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운이 있어야 된다고 웃었다. 그는 자기가 초청장을 써서 이민 수속을 도와줄 테니 우리 가족 모두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살자고 했다.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집사람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교육을 마치고 떠나기 전, 그가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도 발달하지 않고 출국도 어렵던 시절, 재회의 약속은 기약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미국을 간 건 20년 가까이 지난 85년도였다. 그를 다시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부인이 아직 스뷸러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찾아가 보지는 않았다. 그의 울던 얼굴이 문득 생각났다.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고마웠다는 말을 실컷 하지 못한 게, 다시 보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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