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 연말결산 (2024)
2월이 되기 전에 작년에 개봉한 영화 TOP 10을 소개합니다. 2024년을 돌아보며 어떤 영화들이 개봉했고, 제 감상은 어땠는지 정리하는 수준의 글이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다렸던 영화는 <조커: 폴리 아 되>입니다. 사람들 말처럼 엉망은 아니었지만, 제 기대를 충족하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영화가 운명처럼 다가와 큰 여운을 주기도 했네요.
12월의 한국은 난잡하고 끔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부디 상황이 한결 나아져서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순위 내에 한국 영화는 없습니다. 올해에는 <미키 17>과 박찬욱 신작을 필두로 한국 영화계가 더 많은 수확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리스트는 국내 개봉 시기가 2024년인 영화, 재개봉이 아닌 신작을 기준으로 선정했습니다. 제가 고른 영화 열 편을 소개하기에 앞서 아쉽게 순위에 들지 못한 영화들을 일부 소개합니다.
<가여운 것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상 별점 3.0
<룩 백>, <룸 넥스트 도어>, <인사이드 아웃 2>, <에이리언: 로물루스> 이상 별점 3.5
<메이 디셈버>, <조커: 폴리 아 되> 이상 별점 4.0
저는 이 영화를 보자마자 시시포스 신화를 떠올렸습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도 "왜 사느냐?"가 아닌 "왜 죽지 않느냐?"라고 느꼈죠. 화장실 로드무비로 출발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찰로 끝나는 영화.
하지만 유명한 팝 몇 곡을 레퍼런스 삼아 극의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종종 진부하다 못해 촌스러울 정도입니다. 이게 그 유명한 빔 벤더스가 맞나 싶네요.
한편 영화 제목은 Lou Reed - Perfect Day에서 따온 것인데, 조카 이름이 니코인 이유도 루 리드와 니코 두 인물에서 착안했나 봅니다. 모든 의미나 상징이 아무리 그럴듯한 의미가 있더라도 일대일 조응시킨다고 훌륭한 시네마가 되는 건 아니죠.
말하지 않은 이런저런 단점이 더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영화입니다. 10위 정도에 들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위대함을 계승하면서도 프리퀄로서의 존재 가치 또한 확실히 증명한 작품입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는 샤를리즈 테론의 아성을 넘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을까요. 고군분투했고 제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물론, 샤를리즈 테론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도 전편보다 낫다고 할 수 없고요. 하지만 문득문득 어떤 부분에서는 더 나은 측면도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괜찮은 연기,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마고 로비, 헤일리 스타인펠드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90년대생 여자 할리우드 배우입니다.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가 만나 이런 엄청난 영화가 탄생하다니, 실로 놀랍습니다. 리뷰를 자세히 써보고 싶은데 시간이 나지 않았네요. 강력성범죄를 소재로 했고 고어 묘사도 짧게 있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이동진 평론가님의 <파벨만스> 한줄평을 살짝 비틀어 한줄평 남깁니다. "카메라가 없으면 시선도 없다."
씨네21 오진우 평론가님의 표현을 일부 빌리면, '프리티 우먼 2024'라고 볼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2024년의 수준으로 개선된 프리티 우먼이라고 하면 좀 더 정확할 것 같네요.
저는 놀랍게도 16살 때 아버지의 추천으로 처음 프리티 우먼을 봤습니다. 콜걸이 부자 잡아서 소위 취집하는 포르노 로맨스를 추천하다니, 아버지가 나이에 비해 진보적이긴 해도 이런 분야에선 역시 꼴통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노라>는 전혀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엔딩 하나만으로도 그 한계에서 철저히 벗어납니다. 이 라스트 씬은 올해 최고의 엔딩으로 꼽는 평론가도 꽤 있을 정도로 여운이 짙은 엔딩입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있다 소개할 4위 영화가 제 마음속 올해의 오프닝-엔딩을 함께 수상해서요.
스페인 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대표적인 과작(寡作) 감독, 빅토르 에리세가 31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장편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의외로 화제를 모은 덕분일까요? 그의 최고작으로 불리는 <벌집의 정령>이 곧 재개봉한다고 합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벌집의 정령 포스터 속 예쁘장한 아이가 바로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아냐입니다.
영화에 기적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 기적의 살아있는 증거 중 하나로 칭송받아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하네요. 작년 말에 관람하고 4점을 부여했으나 계속 4.5점으로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입니다. <벌집의 정령>을 보고 나면 정말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젠데이아는 제 생각보다 연기를 훨씬 더 잘하는 배우였습니다. 그는 주연 배우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이 작품 제작에도 참여했어요. 이제 MZ 아이콘을 넘어 향후 10년 정도 커리어 관리까지 한다면 그 네임밸류로는 가히 비교할 호적수가 또래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같은 96년생이면 플로렌스 퓨, 안야 테일러 조이, 헤일리 스테인필드가 더 좋지만요.
그리고 <챌린저스>는 며칠 전 발표된 아카데미 시상 후보 목록에서 '0 노미' 기록을 세웁니다. 어떻게 음악상 부문 후보에도 없을 수가 있나요? 이게 왜 말도 안 되는지는 메인 테마송 30초만 들어보셔도 알 겁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비견될 정도로 훌륭한 영화는 아닙니다. 다만 <악존>은 하마구치 류스케 커리어의 터닝 포인트쯤 되는 작품으로 매우 흥미로운 위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저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제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남편의 추락사로 용의자가 된 아내가 무혐의로 풀려난다는 플롯은 재미있게도 <헤어질 결심>의 1부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제목은 <살인의 해부>를 모티브로 하고 <샤이닝>, <결혼의 풍경>, <라쇼몽> 등을 오마주, 심지어 O.J. 심슨의 재판 다큐까지 레퍼런스로 둘 정도로 참고한 작품이 상당히 많습니다.
다양한 영화를 참고한 만큼 영화의 장르도 다채롭게 변주됩니다. 초반에는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전개되다가 중반부터는 법정 드라마가 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메타 영화처럼 보이는 구석마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 주인공을 둔 '스토리 창작에 관한 영화'거든요.
이야기 창작에 관한 은유는 이창동의 <버닝>을 떠오르게 합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메타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추락의 해부는 관람한 관객의 수만큼 서로 다른 작가와 스토리가 존재하게 되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살인이냐 자살이냐 묻는다면, 저의 견해는 전자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세한 리뷰는 아래에 링크 남깁니다.
<노 베어스>는 2022년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직전 시점에 촬영한 작품입니다. 감독 본인이 이란 정부로부터 도망 다니며 영화를 찍는 자신의 역할을 맡아 연기했습니다. 이 자전적인 영화도 엔딩이 주는 여운이 엄청납니다. 저의 2024년 만점 영화 단 두 편 중 하나입니다.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 정부의 출국 금지, 창작활동 금지, 강제 투옥과 맞서 싸우는 이란의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입니다. 그를 두고 "자파르 파나히가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은 그의 저항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며 예술적 성취를 과소평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나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누군가에게 반기를 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제정일치 이슬람 전체주의 국가의 정부가 상대라면 어떨까요. 창작 욕구만 있다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을까요? 권위적인 정부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감옥 갈 각오를 하고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자파르 파나히의 저항 정신은 세간의 평가에도 영향을 주겠지만 예술적 성취의 자양분으로도 쓰인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체제에 저항하며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하는데 그 투철한 직업윤리가 영화의 예술적 성취에 도움이 되지 않을 리가 없죠.
어떤 영화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성취가 압도적입니다. 그냥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오감으로 영화를 직접 느껴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자면,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자미로콰이의 히트곡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유명합니다. 뮤비가 상당히 센세이셔널했는데, 카메라 앵글은 고정한 채 제이 케이가 춤을 추고 벽과 가구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창의적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시대를 고려하면 엄청 앞서간 영상작업물이었죠.
조나단 글레이저는 카메라를 적정 위치에 고정하고 마치 리얼 다큐멘터리를 찍듯 배우를 관찰하는 형식의 영화 촬영 방식을 즐겨 썼습니다. 그의 커리어 내내 유사하게 반복된 카메라 기법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비슷하게 활용됩니다. 방 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배우가 맡은 인물의 실제 삶을 관찰하듯 담아냅니다. 이런 현실감은 관객이 영화의 화두에 참여하도록 유도합니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분명히 홀로코스트이지만, 그냥 끔찍한 옛날이야기 보듯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포인트는 현재에 있는 영화죠.
앞선 <추락의 해부>처럼 이 영화도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가 엇갈립니다. 나치 부역자 회스 가족의 단란한 일상과 함께 수용소 벽 너머 비명이 멈추지 않고 들려옵니다. 수용소와 회스 일가의 집 사이의 큰 벽은 관객과 영화 사이 '스크린'과 조응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전에 이 영화 리뷰를 썼을 때,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언급했습니다. 최근에 유시민 작가님의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읽었더니 제가 리뷰에 썼던 내용과 거의 똑같이 일치하는 단락이 있더라고요. 엄청 놀랐습니다.
유시민 작가님은 해당 도서에서 '악의 비속함'으로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은 전혀 평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바로 잡아야 할 악의 평범성에 관한 오해. 어쩌면 이 영화는 어쩌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인지는 리뷰에 더 자세히 써두었습니다. 리뷰 아래에 링크 남기며 글을 마칩니다.
5점 척도 평가는 정말 세상 조악하기 그지없는 평가 방식입니다. 너는 3점, 이건 4점, 너는 5점. 이런 천박한 다트 던지기로 시네마를 한낱 과녁 취급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만족도 조사도 아니고.
하지만 개인이 느낀 감상을 최소한의 계량화를 통해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겠죠. 제게 5점은 영화를 사랑하는 지인에게, 아니 영화를 그냥저냥 가끔 보는 지인이더라도 꼭 그 작품을 관람하라고 추천한다는 뜻입니다. 2023년의 <파벨만스>가 그랬듯, 2022년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랬듯...
2025년에도 작년처럼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