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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겁탈당하는 예술, 반복되는 역사

<브루탈리스트> (2024) 리뷰

by 테리 Mar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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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복원이란, 그 건축물을 일찍이 과거의 어떤 시기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하나의 통합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건축가 외젠 비올레 르 뒤크가 남긴 말이다. <브루탈리스트>가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적이고 구조적인 사조를 영화 전체에 그대로 녹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건축물로서 이 영화는 비슷한 과거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달리 통합된 상태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고전’이라며 평단의 찬사를 받는 걸까?


<브루탈리스트>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나 <아노라>에 밀려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수상에 실패했다.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까닭은 기술적인 완벽함에 있다. 영화의 해석과 함께,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주요 수상에 실패한 원인을 곱씹어 보겠다.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

관객은 오프닝에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을 로우 앵글로 잡은 쇼트를 목격하게 되는데, 마치 1968년 <혹성탈출>의 엔딩을 전위적으로 재현한 듯하다. 이 장면만으로 라즐로 앞에 드리운 어두운 운명을 짐작할 수 있다.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은 엔딩의 뒤집한 십자가와 대칭을 이룬다. 전자가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이민자의 고통을 암시한다면 후자는 기독교인의 모순을 드러낸다. 가톨릭 신자 오드리는 유대인 라즐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모함해 쫓아낸다. 작중 기독교 사상은 제2의 시오니즘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자의식에 따르면 유대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선민(選民)이었다. 이러한 배타성 때문에 탄생한 ‘선민사상’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및 학살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논리로 쓰인다. 이러한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밴 뷰런 부자와 오드리 등 기독교인들의 자본주의적 선민사상과 몹시 흡사하다. 청교도 이주민에 의해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다른 민족, 인종에 가한 폭력과 차별로 얼룩진 피의 역사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외연’을 지녔다. 라즐로가 기차에서 내려 미국 땅을 밟는 첫 시작부터 1940~50년대의 미국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핍박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렇게 외연만 보면 고향을 떠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소수자로서, 또한 예술가로서 살며 고통받은 과정을 담은 연대기 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심층 서사에 깔린 다양한 맥락과 구조가 더 중요한 영화다.


영화는 자본주의를 맹신하며 폭력의 도구로 휘두르는 미국의 천박함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오니즘을 내러티브의 맥락 안으로 끌어오며 끊임없이 풍자한다. 이때 이민자, 약자의 대표로 유대인을 선택해 영화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취하는 태도가 영화 외적인 맥락과 맞닿아 윤리적 문제를 낳는다. <브루탈리스트>는 유보적이다. 영화는 개별 인물이 겪은 사건과 감정을 하나의 건축물처럼 관객에 ‘보여주기’에 집중한다. 이를 핑계 삼아 특정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책임을 유보하며 침묵한다.


누가 누구에게 브루탈한가?

영화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 소수자 코드와 시오니즘 사이의 얄팍한 연결성은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이다. 최근 할리우드의 추세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듯 이 영화는 성소수자, 이민자, 장애인, 흑인, 여성 등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사회적 약자를 모조리 다루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러한 영화의 접근 방식 자체가 약자에 속한 당사자에게 본질적으로 ‘브루탈’하다. 특히 라즐로에게 그러하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LGBT를 다루면서도 왜 정작 그 커뮤니티 내에서 강력한 비판을 받았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브루탈리스트>는 조피아를 내세워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인상을 주다가도, 한순간 다시 이를 비판하는 뉘앙스를 비친다. 어떤 방향으로 ‘보일 수도 있는’ 완곡한 여지를 줄 뿐 특정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조피아는 1부 내내 침묵하다, 남편과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하는 순간 처음으로 입을 연다. 조피아의 침묵은 시온주의와 관련된 불편한 대사를 최대한 피하고자 영화 스스로 선택한 비겁한 침묵으로 보이기도 한다.


밴 뷰런 일가는 라즐로 부부와 함께한 몇 번의 식사 장면에서, “우리도 유대인이다"라는 둥, 페니를 던지며 발음이나 고치라는 둥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같은 식사를 하면서도 강자-약자 구도를 끊임없이 주지시키려고 한다. 미국 WASP가 이민자에게 행사한 폭력과 차별은 라즐로 부부-고든 부자의 식사에서 흑인을 향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유사하게 반복된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같은 유대인끼리도 화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강경 시오니스트 조피아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현실과 타협한 라즐로 부부가 대립하는 구도는 이후의 엔딩을 고려해 볼 때 촌극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민족조차도 정치적 성향이나 신념 때문에 서로에게 ‘브루탈’하게 된다. 


이 영화를 각 이민자와 약자들이 미국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통 정도로 말한다면 매우 부족한 표현일 것이다. 라즐로의 삶이 모든 소수자와 이민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영화의 특성이 발목을 잡는다. ‘브루탈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겁탈당하는 예술

값싼 미국 대리석 대신 이탈리아 대리석을 써야 한다는 라즐로의 주장에 따라, 밴 뷰런은 채석장에 방문한다. 대리석에 물을 뿌리자, 청금색 빛이 돌기 시작한다. 그 실물에 압도되어 황홀경에 빠진 밴 뷰런은 대리석에 뺨을 비빈다. 이 장면은 곧이어 있을 그가 라즐로를 겁탈하는 장면의 예고다.


가진 건 돈 뿐인 미국의 자본가는 자신의 지적 허영과 자격지심 탓에 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간한다. 몇 번이고 라즐로와 대화하며 지적인 영감을 받는다던 그의 대사를 떠올리면 그것이 과연 진실이었는가 의문이 남는다. 예술을 동경하면서도 그것이 나의 자본 없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현실에 기대 자위하는 인물, 그 알량한 우월감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장애인 여성 에르제벳보다 교양이 부족한 자신을 보며 다시금 열등감에 찌드는 인물. 밴 뷰런은 예술을 흠모하고 동시에 질투하는 자본주의의 실체, 하지만 그 자본 없이 실현 불가능한 현대 예술의 구조를 나타내는 인물이다. 라즐로가 당한 강간은 백인 부르주아의 뒤틀린 욕망과 자본-예술 간의 작동 원리를 잘 설명한다.


해리슨은 에르자벳의 강간 폭로 이후 자취를 감추는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앵글에서 사라지는 회스 중령을 연상케 한다. 해리슨의 명예에 흡집이 나고 그가 실종되었으니, 과연 예술은 자본에 승리한 것인가? 에필로그에서 조피아의 연설에 따르면 밴 뷰런 센터는 결국 유대인의 자본으로 완공될 수 있었다. 그는 건물이 라즐로가 있었던 강제수용소의 재현이라며 유대인의 아픈 역사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때 노인이 된 라즐로는 아사 직전으로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방법은 가끔 진실을 섞어 말하는 것이다. 그가 인생을 바쳐 완성한 건축물을 시오니스트가 왜곡한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만약 조피아의 자의적 해석이라면 자본주의가 그러했듯 시오니즘 역시 유대인 라즐로와 그의 예술에 폭력을 행사한 셈이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 전반이 견지하는 의뭉스러운 태도와 연결되어, 정치-윤리적인 비판점을 낳는다.


다시 말하지만 <브루탈리스트>의 태도는 유보적이다. 시오니즘에 관한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에두르며, 관객에게 끝까지 인내심을 요구한다.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건 동시에 영화의 장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처럼 민감한 역사적 사건,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성인은 되지 못한다. 영화가 반드시 일정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시오니즘을 핵심적인 주제로 이용했다면 그만큼의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예술의 완성에 있어 자본이 필요하다면, 이 영화의 완성에 있어 유대인의 자본과 그들이 겪은 역사는 필수불가결이다. 그런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해도 되는가? 어디까지가 적정선인가? 그 해답은 관객 개인에게 있다.


소수자 코드의 도구화

A24는 소규모 인디 영화사로 시작해 <에에올>, <미나리>, <애프터양>, <패스트 라이브즈> 같은 이민자, 소수자 서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며 작금의 위상에 올랐다. <브루탈리스트> 역시 이민자 서사를 주제로 한다. 그들은 지난 10여 년간 마이너리티를 자처하며 약자를 지지한다는 정체성을 꾸준히 지켜왔다. 한 영화사가 특정한 태도를 지향하며 관객에게 일정한 양식과 문화를 약속한다는 것.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이런 탁월한 브랜딩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A24가 제작한 영화 일부는 어떠한가?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소수자 코드를 영화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절대다수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할리우드에서, A24의 최근 행보는 과연 모든 소수자가 자랑스러울 수 있는 형태인가? 개별 영화를 모두 뜯어봐야 온당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극찬해 마지않은 <존오인>도 A24의 작품이니, 평가를 유예하겠다.


아주 나쁘게 말하면, <브루탈리스트>는 가자 지구를 둘러싼 유서 깊은 갈등을 마치 옛날 옛적에 있었던 여러 이민자의 아픈 역사 중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듯하다. 온갖 약자 코드를 동원하고 미국인들의 허장성세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결과물인 영화는 그 비극적 토대 위에 세워진 브루탈한 건축물로서 우뚝 서 있다. 유대인은 영화의 도구로 사용된다.


<존오인>의 조나단 글레이저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의 수상 소감에서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오용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스크립트를 든 손을 벌벌 떨면서 1분 남짓한 소감을 겨우 마치고 내려왔다. 현대의 영화 업계에서 유대인을 레퍼런스로 삼는다는 건 이정도 무게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평생 영화를 못 만들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그런 일.


수상 실패로 경솔함의 대가를 치르다

<브루탈리스트>의 아카데미 주요 부문 수상 실패 원인으로 AI 논란이 언급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경솔한 접근 방식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노라>는 물론 훌륭한 영화지만, <브루탈리스트>를 둘러싼 여러 논란이 없었다면 과연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싹쓸이할 수 있었을까? 막판 스퍼트로 치고 올라와 BAFTA 작품상을 수상한 <콘클라베>도 <브루탈리스트>보다 뛰어난 영화로 평가할 수 없다. 아카데미는 여론의 눈치를 보며 현대 예술계가 추구하는 가치에 맞는 투표 결과를 내놓는다. 오늘날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소수자, PC가 아닐까. <아노라>는 성노동자 여성의 삶을 그렸고 <에밀리아 페레즈>는 LGBT를 담았다. 다양한 인종의 각국 교황이 한데 모인 <콘클라베>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하마스 갈등을 담은 <노 어더 랜드>가 장편 다큐상을 수상할 때, 카메라는 시오니즘 성향의 배우 갤 가돗을 포착했다. 정치현안에 매우 예민한 아카데미가 <브루탈리스트>에게 갖은 영광을 모두 돌려주기에는, 영화의 모호한 태도와 관계자들의 경솔함이 눈엣가시였을 게 뻔하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추악한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후대에 이 영화가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브루탈리스트>는 할리우드가 유대인을 다룬 방식의 레퍼런스로서 자리매김하고, 그 양상이 미래에 반복되지 않을까? 뉴 클래식이라는 평가는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밴 뷰런으로 열연한 가이 피어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프리 팔레스타인’ 뱃지를 달고 등장했다. 이 영화의 관계자들도 저마다 가치관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본래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멜팅팟을 자처했기에 위대해진 것 아닌가? 과정이 아닌 목표가 중요하다는 조피아의 말과 달리, 영화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가치관의 강화를 낳았다.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을 기회를 놓친, <브루탈리스트>입니다.


지난 3월 2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노라>가 주요 수상을 모두 챙겼습니다. 단순히 수상 실패를 떠나 <브루탈리스트>가 '새로운 고전'이 될 것이라는 평론 자체가 제겐 설레발 같습니다.


특히 파시즘의 부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브루탈리스트>의 유보적인 태도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정말 대단한 영화입니다. 야심의 크기에 모자라지 않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그 야망에 걸맞은 눈치나 책임감을 보였다면 아카데미 수상을 필두로 정말 기념비적인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 영화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작품 내적으로 녹아드는 인터미션의 아이디어도 신선한 시도였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특유의 스탠스 때문에 결코 만점을 줄 수는 없겠네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4.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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