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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un 25. 2023

사우나는 못 가고 식은땀만 쏟은 날

다시 찾아온 아빠 찬스

"나는 공주랑 왕자가 아빠를 잘 따르는 게 속상해."


언니가 말했다. 나를 오래 안 언니, 내 얘기를 듣고 같이 울었던 언니, 애들 다 데리고 우리 동네까지 택시 타고 와서 밥 사 주고 위로금도 주고 갔던 언니, 내가 애들 아빠에게 마구 해대고 퍼붓지 않아서 자기가 다 한이 남았다는 언니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이 아빠를 전보다 더 따르며 좋아하기를 바라고 의도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언니,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미워하는 건 되게 힘든 거예요. 아이들이 힘들지 않으면 좋겠어요."


애들 아빠가 다행히도 현관에 짐만 놓고 뒤돌아 나갔던 그날,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했을 그 사람을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그리고 오늘,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과연 아빠랑 친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 내 결정이 옳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일이.

  



"엄마, 우리 사우나에 갈까? 거기 찜질도 할 수 있고 수영장도 있고, 엄마도 피곤하니까 거기 가서 피곤한 거 풀고, 나도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좀 풀고 오면 좋을 것 같은데에?"


공주는 전에 친구랑 친구 엄마랑 다녀온 사우나가 퍽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자꾸만 엄마랑도 거기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생리해서 못 간다, 할일이 너무 많아서 못 간다, 박물관 예약을 해 놨다, 별별 핑계를 댔는데 하필이면 아무 일정도 없는 일요일, 아이가 또 사우나 얘기를 꺼냈다.


같이 가려면 갈 수도 있지만 사실 왕자 환복이 문제였다. 매표소 앞에서 아무 남자 어른을 붙잡고 우리 왕자를 좀 부탁할까 생각도 했으나 조금 조심스러웠다. 이런 사정을 얘기하니 공주는 대번에 아빠한테 부탁해 볼까? 그랬다. 다 같이 찜질방이라니, 내 평화를 또 해칠 순 없어서 아빠도 일이 있지 않겠냐며 에둘러 말렸으나 공주는 이미 귀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었다.  


"아빠, 우리 엄마랑 같이 찜질방에 갈 건데, 아빠도 갈래요? 아빠 바쁘면 왕자 옷 갈아입는 것만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왕자가 이제 안 어려서 옷을 갈아입으러 같이 못 간대요."


제발, 제발, 그에게도 한 주에 두 번이나 이런 이벤트를 감당할 만큼의 덤덤함은 남아 있지 않기를 빌었다. 공주가 몇 층에 뭐가 있고 어쩌고 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 나는 이미 사우나에 들어간 듯 이마와 등짝에서 땀구멍이 열리는 느낌이 났다. 애들 아빠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아이의 반응을 보니 그도 열심히 거절하는 듯했고, 전화를 끊은 공주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


다음에 가족탕에 가자고 말한 뒤 아쉬운 대로 야외 물놀이장에 가서 놀고 왔다. 깔깔대며 웃다가 또 치고받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을 그늘막에서 바라보며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셀프 샤워와 샴푸까지 마친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갔다.


아이들이 쿠키런이니 신비아파트니 하는 책을 탐독하는 동안 어른책을 구경하러 갔다가 마침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가족이란 무엇인가>가 눈에 띄어 빌려왔다. <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썅썅바 여자가 될 내 용기를 응원해 준 적 있는 이 옛날 오빠 책에서 뭔가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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