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마음을 인정하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이혼하면서 아이들 마음에 상처가 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부부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한쪽이 바람을 펴서든, 폭력을 행사했든, 도박을 했든, 성격이 안 맞았든 어쨌든 결국 아이는 엄마와 아빠 중 한 사람과만 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서 아이들은 분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러니 이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제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최대한 스트레스를 적게 받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이혼하고 나서 반년쯤 지났을 때 한 아이를 알게 되었다. 누가 봐도 엄마가 엄청 공들여 옷을 입히는,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상냥하고 귀여운 여덟 살 아이였다. 그러다 몇 개월 뒤 우연히 마주친 그 아이는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인사하고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아이의 부모가 이혼 중이라는 사실을 다른 엄마한테 들었는데 흑화한 아이 상태를 즉시 납득하고선 그런 나 자신에게 실망했었다.
이후 나는 부모의 이혼을 겪고 아이가 단지 소극적으로 변했다거나 삐딱해진 정도라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다른 열 살 아이도 만났다. 친구와 노는 모습을 본 지 10초 만에 '와, 얘는 정말 똑똑한 아이구나!' 싶은 동시에 내가 얘의 엄마였다면 귀에서 피가 나고 참 피곤할 것 같은 아이였다. 평소 나는 길에서 만난 아무 사람이랑도 담소를 잘 나누고 마음을 잘 여는 편인데, 이 아이는 여러모로 좀 독특했다.
아이는 생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기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더니 사실 아빠집 비밀번호도 자기 생일이며 아빠는 엄마랑 맨날 싸우다가 결국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고 얘기했다. 깜빡이 없는 폭로 앞에서 나는 어른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생각했다. 아무 답도 못 내리고 그냥 "그렇구나~" 하는 소극적인 반응밖에 못 했지만 아이는 즉각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큰일난 것 같아서 애 엄마를 소환하고 싶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매일 싸웠으며 자신은 침대로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은 것, 그래도 소리가 다 들린 것, 애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 줄 아냐고 엄마가 소리 지른 것, 아빠가 욕을 한 것, 그리고 할머니 집에서 먹는 밥은 맛이 없고 반찬도 늘 똑같다는 말을 했다. 전학 가서 베프들이랑 헤어졌다는 얘기도 친구랑 하는 걸 들으며 초면에다 또래 자녀를 둘이나 둔 이혼녀로서 나는 내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많이 슬펐다.
이혼 가정 아이들은 다 개판이 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덕분에 회복력이 좋고 독립적인 어른으로 자라기도 한다. 다만 부모의 갈등이 토네이도처럼 벌어질 때 영향을 이런 식으로 받는 아이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사를 가거나, 다니던 학교 혹은 학원을 옮기게 될 때 아이의 긴장은 더 커진다. 자녀의 마음과 거기 드리운 먹구름에 대해 어른이 충분히 얘기 나누면서 불안이나 응어리를 풀어 주면 좋겠다.
이혼 전 아이들을 걱정하며 구천—이라고 쓰고 구글이라고 읽는다—을 떠돌던 중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한 레디터(레딧 이용자)의 글을 봤다. 자신은 웃음소리가 엄마를 닮았는데 아빠가 그걸 싫어해서 아빠랑 있을 때는 웃음소리를 다르게 내려고 애썼단다. 부모가 이혼을 하면 자녀가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는 게 영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자녀는 나이가 어려도 나름대로 배려를 한다.
어떤 아이는 아빠랑 있을 때는 엄마의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한다. 엄마랑 있을 때는 아빠 얘기를 안 꺼내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어린이표 배려와 눈치에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부모랑 다 같이 사는 친구들을 보면 박탈감이나 고립감을 느낄 수 있고, 친구들한테 이혼을 숨기려다 보면 말도 가려서 할 텐데 제일 편해야 하는 집구석에서조차 눈치를 보고 살면 어린이의 인생이 너무 고달플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아이들이 아빠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아빠 얘기를 자주 꺼냈다. 아이들이 뭘 하고 싶어 하면 아빠한테도 물어보자는 얘기를 했고 가끔은 처음 사 온 과자나 음료수 같은 걸 아빠집 갈 때 인원수에 맞춰 넣어 주기도 했다. 같이 즐겁게 먹으라고 아이들과 함께 아빠 몫을 챙겼다. 아이가 뭔가를 성취하면 칭찬한 후 아빠도 아주 좋아하겠다고, 아빠에게도 칭찬과 축하를 잘 받게끔 아빠와의 만남을 기대하게 했다.
졸업식이나 공개 수업 같은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대체로 소식을 공유하며 참여 여부를 확인했고, 그렇게 파악한 소식은 아이에게 미리 얘기했다. 아빠가 올 때는 아빠가 같이 올 수 있다고 기쁘게 소식을 알리기도 했고, 아빠가 일 때문에 못 온다고 할 때는 그렇게 소식을 알렸다. 후자의 경우 나는 제 발 저리기라도 한 듯 이것은 우리 상황과는 상관없고 다른 집들도 엄마 아빠가 모두 다 오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알려 줬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의 인생이 더 불편해지기를 바라지 않아서다. 아이들이 맘 편히 아빠와 좋은 관계를 맺기 바라서다. 살아가면서 힘든 여러 순간, 의지하고 기댈 사람이 하나 더 있기를 바랐고, 허심탄회하게 엄마 욕을 할 끈끈한 관계가 하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아빠 얘기를 꺼내지 않고 아이들이 내 앞에서 아빠 얘기를 꺼낼 수 없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쪽이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입이 방정이라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많이 했다. 말을 이렇게 안 들을 거면 아빠랑 살라는 최악의 멘트부터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아빠와의 연애 스토리를 물어봤을 때도 짜증이 솟구쳤다. 나에게 어떤 나쁜 면이 있는지는 가족들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제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해서 일어나는 히스테리컬한 잡도리의 순간들은 일단 차치하고, 이혼 후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지는 얼마든지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다.
많이 떠들었지만 솔직히 나도 이제 겨우 2년 지났을 뿐이라, 그리고 망나니 엄마인지라 뭐가 정답인지 설파할 깜냥은 안 된다. (혹 비양육자가 양육에 아무런 의지도 없고 협조도 안 하는 경우에는 자신만의 돌파구를 잘 찾길 바란다.) 다만 나는 이혼녀이기 전에 주양육자로서, 아빠를 2주에 한 번씩만 만나는 아이들을 위해 뭐가 좋을지 계속 고민했다. 분명 순두부 젤라또 집에 가서 뭐 먹을지 결정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의미 있는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열 살 아이가 아무나 붙들고 떠들었던 바로 그 사건, 아빠가 짐을 싸서 나간 그 사건을 똑같이 겪은 아이들과 내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