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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r 10. 2023

물수건을 남기고 떠난 애들 아빠

사랑은 향기를 남긴다는데

주거 분리 4개월 차,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제시간을 한참 넘겨 퇴근하게 된 것.


예상을 못 했고, 아이들에게 예고도 못 했고, 학교에나 학원에서 휴대전화를 꺼두는 바람에 집에서도 종종 폰을 꺼두는 공주가 연락을 바로 안 받을 수도 있다. 기다리다 언제 오냐고 엄마한테 전화 걸 줄 모르는 아이들은 아니지만 집에 왔는데 또 자기들끼리 계속 기다리게 하면 싫을 것 같았다. 생각나는 건 퇴근이 많이 늦어지거나 급하게 도움 필요하면 연락 달라고 법원에서 말했던 애들 아빠. 카톡을 보냈다.


퇴근이 늦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면 공주랑 영상통화 좀 해 주세요, 애들끼리 챙겨 먹을 수도 있는데 배 많이 고프면 데워 먹으면 된다고도 알려 주세요. (라는 내용)(내 연락을 못 받으면 아빠 연락도 못 받을 수 있는 건데 갑자기 일복이 터져서 뇌가 잠시 고장난 모양.)


답장이 왔다.

애들 데리고 있겠다고, 태권도 언제 끝나는지 알려주면 집으로 데려와서 밥도 챙기겠다고 했다.


냄비에 미역국 끓여둔 것, 냉장고에 샐러드 채소 씻어둔 것, 이런저런 먹을 것을 챙겨주면 되고 아이들과 같이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알겠단다.


마음 놓고 일하는데 사진이 왔다.


18개월에 중이염 걸린 이후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말고는 병원에 간 적이 (아마도) 없는 우리 왕자님.


열이 나네?


혹시 몰라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한 줄이란다. 요즘 피곤해하더니 환절기 감기인가 보다. 해열제를 먹였고, 다음 해열제는 몇 시 이후에 먹이면 된다고도 연락이 왔다. 태권도에서 늦게까지 있었으면 아픈 왕자도, 누나도 힘들었을 테고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도 퍽 속상했을 텐데 애들 아빠가 돌봐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애들끼리 집에 한참 둘까, 태권도에 더 오래 둘까,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 아빠 얼굴 보고 목소리라도 들으면 좋을 것 같아 연락했는데 나 자신 참 잘했다. 아이들을 챙겨준 그 사람도 참 잘했다.




퇴근하는데 배가 아팠다. 원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위가 꼬이고 소화 기능이 추락하는 사람이지만 오랜만에 배가 많이 아팠다. 집에 와서 현관에 애들 아빠의 신발이 있는 걸 봤고, 방에서 나온 그 사람은 왕자는 밥 먹고 잠이 들었다고, 양치는 못 했다고 했다. 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공주가 나에게 다시 알려줬고, 그 사람은 애들이 좋아하는 꽈배기랑 도넛 사 온 걸 설명하면서 내 것도 있으니 먹으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지난번에 애들이 "아빠집"에서 돌아오면 먹을 스파게티를 삶다가 양 조절에 크게 실패해서⏤아직도 4인분 5인분씩 요리할 때가 있다⏤애들 아빠도 애들 데려다주면서 같이 스파게티를 먹고 갔었다. 계속 긴장하지만, 익숙해지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일들을 자꾸 마주하게 되는 건 내적 긴장도가 많이 높은 사람에게 쉽지 않은 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알려주며 적응하려고 한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저녁에 있었던 일 브리핑을 끝낸 애들 아빠가 옷을 챙겨 입고는 이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헷갈리지 않게 고맙다고 인사를 잘 건넸다. 아빠가 자기 아이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책임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나는 내 몫을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빠가 떠나는데 공주는 아빠를 배웅하러 일어나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는데 이번에 또 그랬다. 어색한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걸까 싶어 더 권하지는 않았다. 아빠가 떠난 후 새 학년, 새 학기, 새로운 친구 사귄 얘기를 했다. 누구에게는 이혼 얘기를 했고 누구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는지 조잘대는 공주와 모처럼 대화를 잘 나눴다.


동생이 아파 일찍 잠들었더니 뜻밖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


약을 먹어도 계속 아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주방에 들어가 마저 치우려는데 아까는 안 보이던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손이 안 가서 잘 안 쓰던 수건이 왜 젖은 모습을 하고 식탁에 있는 걸까, 애들이 뭐 쏟아서 닦은 걸까 하며 건드렸다가 상당히 차갑구나 싶은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열나는 왕자를 위한 아빠표 물수건이었다.  


이사 나올 때 어머님이 챙겨주셨던 것.




세상 모든 연애와 결혼의 모양이 닮은 듯 다 다른 것처럼 이혼의 모양도 비슷한 듯 제각각이다. 한껏 야무지고 싶었지만 결국 유야무야 지나간 어떤 일에 대해 들은 변호사님이 한숨을 쉬었고 친구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 사람과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모양으로 연애와 결혼을 이어갔던 우리는 이혼과 이혼 후의 삶도 우리만의 모양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사람도 나도 지나간 결혼생활만큼이나 이혼 후의 삶 역시 꿋꿋하게 이어가리란 걸.


편하진 않지만 한 식탁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고 연락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는 마침내 이혼했기 때문이다. 이혼을 결정할 때 숨통 좀 트고 살고 싶었던 내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면, 이혼이라는 고통 가득한 과정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면서 숨통이 조금 트인 지금은 아이들이 아빠와 잘 지내는 일을 1순위로 놓고 싶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는 건 참 괴로운 일 아닌가. 엄마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아빠랑 오래오래 잘 지내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 큰 욕심은 아니길.


‘애’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고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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