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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Feb 26. 2023

편의점의 이혼녀들

동병상련과 동지애 사이 그 어디쯤

집에 있는 엄마 말이 공주가 삼각김밥 먹고 싶다고 했단다. 편의점에서 사달란다. 어제도 집에서 만들어 먹었는데, 한 번도 사 준 적은 없는 음식인데 편의점에서 파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근데 또 왕자는 '그냥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단다. 퇴근 전 김밥집에다 주문 전화를 했다. 꼬마용으로 얇게 썬 한 줄을 포함, 총 세 줄을 받아 들고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사려던 삼각김밥 옆에 포켓몬빵이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한 컷의 대사만 바꾼 유명한 짤.


그런데 빵이 하나다. 또르르...... 우리 집엔 애들이 둘이라서 빵이 짝수로 필요한데 곤란했다. 빵은 나눠 먹을 수 있지만 띠부씰은 나눠 가질 수가 없으니까. 지난번 운이 좋아 빵을 세 개 사갔다가 싸움이 나는 바람에 즐겁게 빵을 샀던 나 자신을 저주한 사건도 있었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알바하시는 어머님 같은 분께 포켓몬빵이 더 있는지, 여기는 포켓몬빵 언제 들어오냐고 물었더니 밤에 9시 반에나 들어온다고 했다. 몇 개 들어오냐고 했더니 보통은 두 개가 들어오고 가끔 세 개도 들어온다고 했다. 그마저도 대기했다가 사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도 덧붙이셨다.


애가 둘이라서 하나씩 사 줘야 해서요, 하고 아무도 안 궁금할 소리를 하며 이따 나와서 살 요량으로 안 매운맛 삼각김밥을 하나를 골라 계산하려니 이번에는 그 어머님이 바코드를 찍으며 나한테 물으셨다. 애가 둘인데 삼각김밥은 왜 하나를 사냐고.


큰애랑 작은애랑 먹고 싶은 게 달라서 이거는 큰애 먹을 거라서요, "수발들기 힘드네요." 하며 묻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웃었는데 상상도 못 한 반응이 돌아왔다.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

아아, 그 표정. 우리는 분명 아침 드라마 분위기로 시답잖은 스몰 토크나 나누던 중이었는데 수발들기 힘들다는 내 말에 어머님 혼자 다큐라도 찍는 듯 순식간에 너무나 진지해지던 그 표정과 말투. 나는 방금 그 말이 아주머니의 200프로 진심임을 직감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내가 눈을 또 크게 떴는지 편의점 어머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잘해줬거든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잘해줬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키웠는데 그걸 모르더라고. 내가 노력한 걸 애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같애. 25년을 키웠는데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너무 지쳐 보이셨다. 어머님 눈에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같았다.


"저는, 애들이 아직 어린데 벌써 힘들어요. 어머님은 너무 잘해주셔서 그걸 후회하실 수 있네요. 멋지세요. 저는 평생 그런 후회는 못 할 거 같은데. 벌써 잘못한 거가 너무 많은 거 같고."


편의점 어머님도 갑자기 위로를 건네셨다.


"우리 애기 엄마도 보니까 잘해 줄 거 같은데? 애들 먹고 싶은 거 따로 챙겨 주고, 빵도 사 주려고 하고. 애기 엄마 지금 잘 참고 애들 키워서 얼른 독립시켜요. 나는 우리 애 생각하면 아유... 정말 열심히 키웠는데 너무 몰라 주니까 배신감이 들고, 내가 근데 주책이네, 손님한테 이런 말을 다 하고."


너무 잘해주지 말라고 하실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많이 힘들어 보이시길래 살짝 계산대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는 냅다 헛소리를 시전했다.


"저는 지금 이혼하느라 애들 고생시켜서 집에 엄마가 와 계세요. 열심히 키워서 독립시켰는데 또 속 썩이는 딸내미가 바로 저예요." (소곤소곤)


어머나 세상에나, 라는 표정을 한 어머님의 얼굴이 순간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조심스레 이어진 편의점 어머님의 소곤소곤 대답.


"나는 이십 년 됐어요."


입이 떠억 벌어지는데 갑자기 시커먼 고딩들이 떼 지어 컵라면을 계산하러 왔다. 아홉 시 반에 온다는 빵 사러 이따 운동 가면서 또 올게요, 하고는 집에 가서 사이좋게 김밥을 먹고, 아이들 할 일을 마치게 하고, 양치에 잠옷 환복까지 끝낸 후 나도 운동복으로 환복하고 엄마에게 아까 되게 웃긴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한 뒤 다시 편의점으로 갔다.


내 몸 추스르러 운동 나가는 게 엄마한테 효도였다고 믿고 싶다.




들어가며 아까 그 편의점 어머님께 인사를 했다. 행사 중인 무알콜 맥주를 사서 하나를 어머님께 건네며 어머님 이거 드세요, 무알콜 무알콜, 하고 주접을 떨었더니 괜찮다며 사양하던 어머님 왈,


"마시려면 알콜을 마셔야지!“


깔깔깔. 아이코 제가 생각이 짧았다며 나 혼자 한 캔 까서 어머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편의점 어머님네는 가정폭력이 있었다고 했다. 네 살짜리 애기 데리고 집에서 그냥 나왔다는 이야기, 쉼터에 가서 지냈었다는 이야기, 맞고 살던 사람에게 판사가 조정을 해 보라고 해서 아주 기가 찼다는 이야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양육비 한 푼 받지 않는 걸로 하고 지금껏 혼자 아이 키우셨던 이야기, 그래도 체험학습 많이 쓰면서 아이와 놀러 많이 다녔다는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감동란 기프티콘으로 스타벅스 라떼를 사려다 실패하자 음료를 그냥 놓고 떠난 손님, 무슨 담배를 찾는 손님, 어묵을 먹으러 온 손님, 손님들 사이사이로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온다던 아홉 시 반이 한참 지나 트럭이 도착했고, 나는 새로 들어온 빵 세 개 중 두 개를 골라 계산대 앞에 다시 섰다.


핸드폰과 카드를 쥐고 내 포켓몬빵 바코드 다 찍으시길 기다리는데 어느 순간 어머님이 카드 리더기에 처음 보는 카드를 넣고 계셨다. 혹시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 카드를 실수로 먼저 받으셨나 싶었다.


“어머님, 저거 누구 카드예요? 제 카드 아니에요.“


“어어, 이거 내 카드. 내가 애기들 주는 거예요.”


아이코, 어떡하나. 아이코, 이걸 어떡하나. 어떡하나 소리만 반복하는데 어머님이 뒷 손님 포켓몬빵 계산해야 한다고 애기 엄마 빵 들고 가시라고 손을 휘적이셨다.


"아니, 계산해 주실 줄 알았으면 빵을 전부 제가 사는 건데..."


쓸데없이 명랑하여 안 슬퍼 보인다는 편의점 어머님의 말처럼 나는 또 입을 잠그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 맨날 울고 살지언정 웃음마저 잃을 순 없으니까요.

어머님이 사 주신 건 내가 좋아하는 파이리빵이었지만 정신줄 놓느라 먼 옛날에 샀던 포켓몬빵 사진으로 대체.



딸내미 볼일 편히 보라고 방학 중인 손주들 데리고 집에 내려가신 우리 엄마. 엄마 바래다 드리고서야 와 줘서 고마웠다고, 엄마 볼 낯이 없고 미안해서 안 반가웠다고, 그래서 엄마가 청소하는 것도 싫었다고 말씀드렸다. 목멘 소리로 다 안다고, 엄마는 엄마딸 믿는다던 우리 엄마.


니 딸 너무 믿지 마시라 말씀드렸다. 엄마한테는 이렇게나 발칙한데 그 긴 세월 왜 남편한테는 그러질 못했을까. 참 괴랄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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