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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r 05. 2023

이혼 일주일 만에 한솥밥 먹은 일

단언컨대 아주 특별했던 아들 생일밥


제출하신 가족관계신고의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중에 받은 문자를 보고 아아, 이제 정말 남편과 내가 더는 부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왕자의 생일이 당장 코앞이었다. 친정 엄마랑 언니랑 미리 생일밥에다 케이크까지 잘 챙겨 먹었지만 생일 당일에는 아이 아빠가 일정이 있어 내가 선물 증정만 하고서 여느 때보다 더 소박한 저녁 식사(와 넷플릭스)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외국 생활 중에도 생일이면 항상 잡채며 크림소스 새우 튀김이라든가 취킨 요리라든가 미역국이라든가 하는 아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집도 석가탄신일 연등을 닮은 폼폼과 가랜드로 꾸며서 기념했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 좋아하는 감자튀김과 떡볶이 정도만 간단히 만들었다. 어찌나 썰렁했는지 오죽했으면 딸아이가 밥을 먹다 이런 말을 다 했다.


"엄마, 생일인데 집이 너무 조용한 거 같애. 조금 더 시끌벅적해도 좋을 것 같은데."


정말 그랬다. 이상하게도 참 조용했다. 언니한테 영상통화를 걸어 조카와 언니의 목소리로 적막함에 약간의 소음을 보태어 봤지만 전화를 끊으니 다시 집이 조용해졌다. 뭔가 더 흥겹기를 바랐던 공주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에 아빠랑 점심 먹으면서 제대로 축하를 할 예정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서 또 생일 축하를 하면 축하만 네 번이나 하는 셈이라고, 그게 무슨 굉장히 멋진 일이라도 되는 듯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공주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12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다고, 태권도에서 동생한테도 말했단다. 아빠는 정말 예정대로 12시에 왔고, 엄마는 종종 그렇듯 빠듯하게 외출 준비를 했고,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주가 바랐던 것 같은 시끌벅적함 속에서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왕자의 생일은 공주가 누나가 되어 인생이 고단해진 날이기도 하니 공주의 입맛 따라 횟집으로 향했다가 아직 영업 전이길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백 개 있는 뷔페에 갔다.


이동하면서 나는 행정 처리 완료 문자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제 등록된 거주지를 행정적으로도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류 작성은 함께 했지만 제출은 나에게 일임하겠다며 제출 여부를 알려달라고 한 후 먼저 자리를 떴던 그가 절차 마무리 소식에 알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조만간 상담을 받으러 갈까 싶다는 말도 전했다. 서두를 것 없이 차근차근 하나씩 진행하려 한다고.


아이들은 아빠를 아주 반가워했다. 상담하는 친구 말로는 '조적 방어'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잘 모르겠다. 법원에서 만나 차례를 기다리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때도 남편이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아이들이 자기랑 있을 때 "너무 과하게 밝은 것 같다"고. 엄마 히스테리에 시달리느라 아빠가 반가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는데 남편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린이들에게도 슬픔과 불안에 대처하는 나름의 서툰 방법이 다 있겠지. 못난 애미는 모쪼록 아이들이 너무 힘들지 않고 잘 지나가 주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남편에게 아이 생일밥을 다 같이 먹자고 제안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진짜 끝났다는 이 신선하고 막막한 공허함을 아이들과 더 면밀히 공유할 필요는 없으니까. 예전처럼 생일상을 차려줄 에너지는 없었지만 엄마 아빠가 쭉 따로 살게 되었을 뿐, 세상이 끝난 건 아니라고, 아이의 생일은 여전히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할 일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긴장해서 체하려나 싶었는데 밥은 술술 넘어갔고, 애미 닮아 편식하는 왕자도 더 이상 못 먹을 때까지 밥을 잘 먹었다.


한솥밥이 아니고 한냄비밥인가. 어쨌거나 잘 먹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즐거워했고 남편도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나도 힘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고기가 익으면 그걸 남편과 아이들의 앞접시에 골고루 나눠 담았고, 남편도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잘 가져다줬다. 뷔페 가면 혼자서도 음식을 잘 담아 올 줄 아는 아이들이지만, 진작부터 달걀도 혼자 굽고 탕후루도 혼자 만들겠다고 요리왕에 빙의해 살아온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응석받이가 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해한다, 내일모레 마흔인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식사 끝나면 모처럼 혼자 카페에 좀 가 보려고 선물 받은 책을 챙겨 나갔는데 배 부르고 피곤하니 그냥 눕고 싶었다. 아이들 데리고 시댁으로 떠나면 되는 남편은 혼자 가겠다는 나를 집까지 잘 태워주었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이들에게는 조심히 다녀오라는 인사와 가서 말 잘 들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공주와 왕자도 해맑은 작별인사를 잊지 않았다.  


엄마도 잘 쉬고 있으세요~!

애들이 이렇게 말하면 꼭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불편하다. 엄마가 힘든 티를 많이 내는 바람에 이런 인사를 하는 걸까. 하룻밤 자고 돌아오면 왕자 그 요사스러운 녀석은 또 나한테 들러붙으면서 이렇게 말할 테지.

"엄마, 잘 쉬셨어요? 나 엄마 엄청 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없었으면 이혼하고도 남편 다시 만나 같이 밥 먹는 일 따위 없었을 텐데, 하여간 이혼이란 참 별일이고 부모됨도 참 별난 일을 많이 겪게 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코너 속의 코너, 도비와 함께 노래를.


커피소년도 대충 만들었다고 고백한 <대충해요>.

모범생은 잠시 그만. 아들 생일상 못 차려도 괜찮아요. 애들아빠를 계속 남편이라 부르며 실수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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