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았다.
아이들이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주말, 친구를 만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첫째 아기띠를 하고 세 식구 첫 단풍 구경을 나왔던 덕수궁, 지난가을 힘들 때 아이들과 함께 단풍 구경 했던 그 덕수궁 돌담길을 남편도, 아이들도 없이 걸으려니 착잡하고 아이들 생각이 나면서도 홀가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을 하면서도 미술관, 박물관 좋아하는 아이들이 봤으면 좋아했을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
어련히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테지만 자기 전에 통화 잠깐 해야겠다 하고 전화 걸었더니 내일 아빠랑 바다에 다녀오기로 했다며 아이들이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잘됐다고 잘 자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일요일 저녁 메뉴 주문을 받았더니 공주는 된장국, 그리고 아무 잡곡 넣지 않은 흰쌀밥을, 왕자는 계란찜을 예약했다. 언니와 브런치 먹고 잠시 쉬다 운동하고 장 봐서 집에 들어와 요리를 하는데 아이들이 도착했다.
갈매기 과자밥 준 이야기, 핫초코 들고 잠들었다가 다 쏟은 이야기, 뭐 사 먹은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흥을 주체 못 하던 아이들. 바래다준 아빠가 떠날 때가 되자 왕자는 아빠랑 닌텐도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라고, 아빠랑 게임 좀 해도 괜찮다고 했는데 애들 아빠가 일이 있어 가 봐야 한다고 다음에 또 하자고 했다. 아쉬워하는 왕자를 한참을 안아주고서는 가 보겠다 인사하고 아빠가 떠났고, 왕자는 아빠가 떠난 현관 앞에 그대로 주저앉아 꼼짝 않았다.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추스르고 일어나려나 싶어 그냥 뒀는데 왕자가 계속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말을 걸었다.
“왕자, 슬퍼?”
갑자기 너무 슬퍼진 왕자의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슬프냐는 엄마 물음 속에 미안하다는 말이 백 개쯤 든 줄 우리 꼬마는 언제 알게 될까. 차라리 영영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아빠 가서 슬퍼?”
다시 물었는데 입꼬리가 축 처지더니 왕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리 와, 안아줄게, 하고 말했더니 바닥에 붙어 울던 아이가 일어나 쪼르르 와서 품에 안겼다. 아빠랑 닌텐도가 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제 새로 다운 받은 게임을 많이 못 해서 더 하고 싶었다고. 다음에 왕자랑 게임 많이 하라고 아빠한테 말해준다고 해도 좀처럼 울음을 못 그치길래 계란찜 다 된 걸 먹어 보라고 한 숟갈 내밀었더니 그제야 왕자가 울던 걸 멈추고는 맛있다고 좋아했다.
아빠와 헤어지는 게 슬픈 이유는 잘 놀고 왔기 때문이니 그건 정말 좋은 일인데 헤어질 때의 슬픔이 달갑지 않다고 해서 못 놀고 오기를 바랄 수도 없고, 나도 아이들도 이런 게 다 새로운 사건이고 못 해 본 경험이라 앞으로도 이런 일을 자주 겪게 될까 봐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다가 집에 와선 신 나게 떠들더니 아빠가 떠나고 동생이 슬픔을 드러내는 이 모든 순간 아무 말 하지 않은 공주는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을까.
애들 할머니는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그거 참는 게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니 그걸 내가 조금 더 못 참은 게 참 아쉽다고 고장난 녹음기처럼 자꾸 말씀하셨었다. 흘려들으려 해도 아이들이 슬퍼지는 순간을 목격하면 어머님 그 말이 떠올라 또 서글퍼지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렇게 더 버텼으면 나는 결국 탈출 타이밍을 놓치고 끓는 물에 익어버린 개구리 신세가 되었으리란 걸.
그와 나의 최선이 결국 이런 모양이라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아이들이 주문한 바다에 다녀왔고, 나는 충전과 방전 사이 어디쯤의 시간을 보낸 뒤 아이들이 주문한 된장국과 계란찜을 만들었다. 무엇 하나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살아가는 건 아이들도 나도 마찬가지. 내 비루한 최선이 아이들을 더 슬프게 하지 않도록 내일은 퇴근하면 내가 같이 닌텐도를 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엄마 왜 이렇게 못 하냐고 욕을 많이 먹을 것 같다.
<도비와 함께 노래를>
이소라가 부릅니다. Track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