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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Mar 25. 2023

딸과 이혼 드라마

이제 이혼 드라마는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끼고 보는 걸로.

지금보다 다섯 살은 더 어렸던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도서관이 문을 닫고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던 남편을 기다리며 설거지를 하고 어질러진 거실 정리를 했었다. 혼자 집 청소만 한참 하려니 시간이 아까워 어느 때는 음악을, 어느 때는 팟캐스트를, 또 어느 때는 넷플릭스를 친구 삼아 틀어놓고 집안일을 했던 게 이젠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어제는 저녁 준비를 하기 전 뭘 볼까 하다가 요즘 인기라는, 그리고 좋아하는 조승우 배우님의 <신성한, 이혼>을 틀어 놓고 볶음밥을 했다. 숙제를 마쳤는지 밥 먹으러 왔던 공주가 주방에 들어와 어슬렁댔고, 나는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요리를 마무리하려는데 공주 얼굴에 일순간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식탁에 몸을 기댄 공주의 시선 끝엔 내 패드가 있었는데, 한혜진 배우가 이혼 변호사 역을 맡은 조승우 배우에게 이혼 소송을 부탁하는 중이었다.


배우님 딕션이 그 장면에서만 더 좋아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혼, 이혼, 하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원래도 내가 테레비를 보면 이따금 와서 같이 들여다보곤 하던 공주인데, 이번 드라마도 그냥 평소에 가끔 보던 그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예민한 걸까. 무서운 장면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돌연 어두워졌던 아이의 낯빛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볶음밥 거의 끝나가니까 식탁 정리 좀 해야겠다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잘 듣고 있던 패드를 덮었다. 단언컨데 무엇 하나 자연스러운 게 없이 머쓱했던 순간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오늘 공주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며 이밍아웃을 했다. 최근의 일이라 아이도 나도 힘든 방학을 보냈다고, 학업이나 교우 관계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전문가로 더 잘 케어해 줄 것을 믿는다고, 가족의 형태를 다룰 때 아이가 자기 상황을 부정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혹시 지금의 상황에서 기인한 듯한 특이점이 보이면 알려 주십사, 그렇게 부탁했다.  


공유해 줘서 고맙다고, 자신을 친언니처럼 여겨달라는 선생님의 말에 제가 동생이 아닐 수도 있다고 헛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담임선생님을 친언니처럼 여길 일은 아마도 학년이 바뀌도록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손에 꼽을 수 있는 이밍아웃 경험은 할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아이가 학교 생활하며 마음이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는 선생님의 응원에 말하길 잘했다 싶었다. 또래 키우는 친구가 자기 아들도 뭐 할 때마다 자꾸 물어봐서 귀찮다고 하길래 자책도 조금 덜어냈다.




찰리 채플린이 이렇게 말했단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좋아만 보이는 인생에도 슬픔이 있고, 슬픔 많은 인생도 멀리서 보면 좋은 시간들이 분명 있다. 들여다보면 엄마의 이혼 때문에 아이가 불편할 순간이 많을 것 같지만, 아이는 이미 누구에게는 부모의 이혼 사실을 밝히고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않으며 딱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헤쳐나가고 있다. 하루하루 잘 보내다 보면 나도 아이도 더 단단해지는 면이 분명 있을 터. 교통사고처럼 이혼을 겪는 아이들의 마음을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럴 여력이 없지만, 아이들이 가진 힘을 믿어 본다.


아무리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려 해도 굉장히 별일인 이혼의 슬픔은 드라마에서보다 현실에서 훨씬 더 길고 깊다. 주말에 무슨 활동이라도 시키면서 애들이랑 한두 시간 따로 보낼 수 있으면 그게 좋고 반가우면서도 꼬박꼬박 밥은 잘 챙겨 먹이는 흔한 현실 엄마는 어쩌다 이혼이 이렇게나 잘 팔리는 소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그 무엇도 내 아이의 명랑함을 해치지는 않으면 좋겠다. 우리집 금쪽이는 나 뿐이면 좋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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