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자꾸 아빠가 보고 싶다는 우리 왕자
엄마, 나 아빠집에 가고 싶어.
7곱살이라고 자기 나이를 쓰는 내 귀염둥이 왕자가 말했다. 아빠를 만나는 주말이 아닌데 아빠를 찾는 왕자에게 나는 예전에도 했던 답을 똑같이 내놓았다.
"아빠 보고 싶어? 다음 주말에 아빠 만나기로 했는데. 그리고 아빠도 일이 있어. 늘 가서 만날 수는 없어."
둘째는 돌 전부터도 고집을 잘 꺾지 않았다. 부단히 애를 썼지만 밤중 수유도 돌이 지나 단유를 하면서야 끊을 수 있었다. 내 단호함이 결코 부족하지 않아도 마냥 거절만 할 수 없으니 왕자에게 아빠랑 전화를 해 보자고 했다.
오은영 박사님, 이게 맞나요? 맞대도 틀렸대도 그냥 이러고 되는대로 살고 싶습니다만.
어느 토요일이었다.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둘째 주, 넷째 주마다 면접교섭 1박을 한다고 썼지만 우리는 거기에 매이지 않기로 했었다. 어느 한쪽에게 사정이 있으면 바뀔 수 있다고. 서류가 마무리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무렵, 미리 얘기했었던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신상 카페에서 신나게 놀고 먹고 마시던 왕자가 갑자기 아빠를 많이, 정말 많이 찾았다.
할 수 없이 만나고 온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애들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왕자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한 뒤 전화를 바꿔줬고, 전화받은 지 얼마 안 된 왕자가 핸드폰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올 수 있대! 아빠집에 가서 자고 와도 돼요?"
된다고 했다. 아빠집에 벌써 아이들 잠옷이며 칫솔이며 각종 장난감이 있는 걸 안다. 아이들이 자주 타지는 않지만 애들 아빠가 자동차에 아이들 카시트까지 구비한 걸 보았다. 우리가 있던 카페 주소를 받은 애들 아빠가 잠시 후 몇 시 도착 예정이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조금 갑작스러웠지만 애들을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아빠를 찾지 않은 공주에게도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소식을 전한 후 놀던 자리를 정리했다. 주차장에 나타난 아빠를 아이들이 많이 반겼다. 너무 신나게 노느라 아빠 생각이 난 걸까 싶었다. 정말 모처럼 즐겁게 잘 놀며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으니까. 와 줘서 고맙다고 한 후 내일 만나요 엄마, 하며 차 안에서 손 흔드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카페로 들어왔다. 가오픈 중이던 카페도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허그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니?"
카페에서 일하던 친구가 팔 벌리고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언젠가 했던 말을 기억해줬다.
"감흥이 없네 근데."
고마운 줄 모르고 괜히 기운 빠져 말했더니 친구가 다시 타이트하게 허그를 해 줬다. 내가 자기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고 하는 친구 앞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량맞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아이들이 없는 주말이 될 줄 몰랐는데, 저녁을 혼자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허전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아빠랑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올 테니 나는 괜찮기로 했다. 나도 좋은 시간을 갖기로 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까.
이제 막 이혼한 엄마와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어느 토요일이 있었다. 왕자는 그 후로도 종종 아빠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번번이 미안했다. 엄마도 아이들도 모두 이 사건과 이런 마음에 적응해야겠지.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아빠랑 전화해 보겠냐는 말에 왕자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빠가 집에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 주말에 만나자고 다시 설명했다. 그러다 원래는 공주만 초대받은 약속에 왕자와 나도 같이 가게 되었다. (럭키!)
난생처음 롤러장에 간 공주와 왕자는 내리 다섯 시간 동안 신나게 롤러를 탔다. 아침에 일어나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다던 왕자는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낮잠을 잤고, 점심 먹고 잠을 이기지 못한 나도 왕자가 로봇 장난감 갖고 노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엄마, 왜 이렇게 오래 자요?"
소파로 와서 굳이 옆에 눕는 왕자는 참 귀엽기 짝이 없었다. 장난감을 다 갖고 놀았는지 약속한 테레비를 보여 달라고 했다. 공주가 친구 집에 놀러간 날은 자기 맘대로 다 골라 볼 수 있는 귀하고 특별한 날. 모처럼 개운하게 낮잠을 잔 나는 리모컨을 왕자에게 쥐어 준 뒤 음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고, 동생이 보내준 설국열차를 닮은 설국향이라는 신종 귤을 뜯어 탕후루를 만들었다.
집안일은 아직 많이 남았고, 속도 조절이 안 되는 시간은 흘러가고, 글은 다 써 가고, 날은 저물어 간다.
오늘 하루 공주의 두 끼를 책임져 준 공주네 친구 엄마에게 너무 고마워 집에 있던 주먹밥 가루 몇 봉이랑 과채주스랑 봄에 소개하겠다고 한 육아 띵템 하나를 종이가방에 챙겨뒀다. 도착한 그 엄마가 차 문을 열고서는 더 큰 종이가방 하나를 들고 내렸다. 나중에 확인했더니 공주와 왕자가 갖고 놀 교구 두 개랑 슬라임이랑 빼빼로랑 참다래 한 봉이 들어 있었다. 고마웠다. 낮잠을 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역시나 세상은 아직 살아봄직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