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살아생전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을줄 상상이나 했으랴. 시규어 로스의 자국 투어 다큐멘터리 ‘헤이마’를 보기 전까지 나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다른 점도 구분 못하는 세계지리 문외한이었다. 황폐한 줄로만 알았던 그 땅이 여행지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된 건 아마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촬영지가 그곳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된 후였을 것이다. 20대 초반, 이후 나의 대인관계에 지난한 영향을 주었던 인생의 암흑기,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나는 하녀방이라고 불렀던 셰어하우스의 아주 작은 골방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이 들어찬 침대와 책상과 옷장 사이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왜냐? 나는 파리에 사는 모든 인종들이 단체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지독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야 했지만 문을 열고 나가는 일부터가 힘이 들어 결석을 밥먹듯이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작은 바늘에 찔려 놓고 손가락 절단 난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지만 당시의 나는 아주 말랑한 심장을 가진 20대 초반의 어른이 서툰 어른이었고, 아주 사소한 충돌에도 어찌 대처해야 할 줄 모르는 국소적 평화주의자였다. (국소적이라고 덧붙인 이유는 그렇다고 내가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말의 양심을 남겨두었다.)
결국 1년을 계획했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반년만에 서둘러 마무리하게 되었고, 나는 2월 중 귀국을 앞두고 남은 방학이라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한 방법을 열렬히 궁리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택을 받은 곳이 아이슬란드였다. 한국에서는 편도로 하루가 넘게 걸리는 여정이지만 샤를드골 공항에서는 고작 세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 한국에 돌아가면 갈 수 없을 것 같은 장소였으니, 이보다 더 의미있는 선택지는 없을 것 같았다. 실패한 학교생활을 엄한 데서 떼워보려는 심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행을 이뤄내면 반년의 골방생활이 마법처럼 의미있는 스토리가 될 것만 같았다. 꿈에 부풀어 항공권을 결제하려는 와중에,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가 방문했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꼭 다가구 세대에 사는 주민들처럼 서로의 방문을 현관문처럼 두드리고 서로의 공간을 확실히 지켜주는 암묵적인 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유일하게 내 방만이 활짝 열려있는 살롱같은 공간이었는데,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나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식구들이 종종 들여다보곤 했다. 나 못지않게 프랑스 생활에 환멸감을 느끼던 룸메이트는 나의 여행 계획을 듣더니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표명했다. 영화를 찍겠다면 혼자 여행하는 게 맞았지만, 삶은 현실이었으니. 눈을 반짝이며 같이 가고 싶다고 어필하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혼자 여행했을 때 못하는 일들이 많을테니까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행도 그렇고 유학도 마찬가지다. 돌아다니는 일에 집착한 것은 사주에 역마살이 껴서도 아니요, 넓은 세상에 내 이름 세글자 남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호기심이 많으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완벽히 끼워맞춰질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 하나 가지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던 것 뿐이다. 마치 완벽한 짝을 찾겠다는 부질없는 노력처럼 장소에도 소울메이트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파리의 이방인이었던 나와 친구는 또다른 이국 아이슬란드에 도착했고, 예약한 호스텔에서는 마치 그런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행복을 여는 열쇠’라는 문구와 함께 방 키를 넘겨주었다.
도착하고 보니 혼자 왔다면 못했을 일이 꽤 많았다. 호스텔의 공동 거실에서 편하게 맥주 한 잔 기울이거나, 문이 잠기지 않는 공용 샤워실을 마음 놓고 사용하는 일. 공동 거실의 맞은편에 앉은 친구와 건배하며 맥주를 쭉 들이키자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 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스운 건 우리와 같은 도미토리에 묵었던 한국인 동생에게 합석을 제안하면서 마침내 세사람 사이에 조성된 한국적인 바이브에 편안함을 느꼈다는 거다. 낯선 언어라면 지긋지긋했다. 장소는 이국이어도 소통은 가능해야 했으므로 나는 익숙한 한국어에 착 달라붙어 찰나의 행복을 붙잡으려 애썼다.
이튿날 친구와 레이캬비크 시내를 거닐던 중, 예고없이 찾아온 우박 폭탄으로 우리는 황급히 몸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마침 근처에 친구가 블로그로 찾아봤다는 핫초코가 유명한 곳이 있었다. 카페 바발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온통 백인들 천지인 카페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박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핫초코를 한 잔 씩 시켜 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기로 했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순간부터 앵무새처럼 뱉고 또 뱉었던 감상은 이곳의 풍경을 보자마자 시규어로스의 음악이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는 거였다. 시규어로스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척박한 날씨와 환경이었다. 화산섬의 변덕은 사람들을 집 안에 붙들어 놓지만 어떻게든 소통하고 살아가는 성질을 지닌 인간은 넘치고 넘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질 때까지 소통해야하는 그 시간의 구멍들을 음악으로 메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 만난 듯 말을 토해내다보니 문득 궁금했다. 언어라는 게 대체 뭘까.
프랑스 생활이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언어였다. 세계 공용어(라고 배운)인 영어 하나만 믿고 무작정 학점교류를 강행했다. 한국에서 짧은 프랑스어 기본 회화정도는 외우고 갔다지만 현지에 도착한 나는 세 살짜리 꼬마만큼도 말을 못하는 일상생활 불구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래서 친구를 무척 부러워했다. 당시 친구는 본격적으로 대학 원서를 접수하기 전 약 2년간 어학연수를 선행하는 중이었다. 카페나 식당에 가서 간단한 대화를 하는 건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종종 친구와 함께 외출을 할 때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안정감을 느꼈다.
다큐멘터리 ‘헤이마’에서 밴드 시규어로스의 멤버들은 자국 투어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말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덕에 밴드를 지속할 수는 있지만 정작 내가 자란 나라,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채로 음악을 계속 하는 현재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 거다. 마치 언어를 가지고도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이 소통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건 물리적인 온기같은 것에 가까운 듯 하지만, 음악이라는 언어를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고민했다는 점에서는 내가 당시 고민하던 바와 결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었다. 불행한 건 말을 구사할 줄 알면서도 마음 하나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 아니더라도 진심이 있는 언어를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현해내지 못하고 자꾸만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라 힘들었던 것 같다. 골방 안에 홀로 누운 채로는 언어를 전달할 수 없었으니. 제프리 맥다니엘의 시 ‘고요한 세상’에서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의 눈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하고
또 침묵을 달래주기 위해
정부는 한 사람당 하루에
정확히 백 예순 일곱 단어만 말하도록
법을 정했다
…밤 늦게
멀리 있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연스럽게 말한다
오늘 쉰 아홉개의 단어만 썼으며
나머지는 당신을 위해 남겨두었다고
…
<고요한 세상>, 제프리 맥다니엘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마음이 통한다면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다행인 것은 언어는 문자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소리도 언어고 숨도 언어며 몸짓도 언어다. 나는 비록 키보드로 문자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지만, 크게는 마음도 언어로 포장해서 담았다. 누구에게든 이 글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1초 정도 입꼬리가 올라가기만 해도 변화는 변화다. 큰 욕심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골방에 누워서도 문자 뿐만이 아니라 영상이나 그림과 같은 다양한 언어로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인 세상이다.
핫초코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눈보라가 그쳤다. 이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그날 나는 시내 초입에 위치한 레코드점을 방문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나는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수염 덥수룩한 청년에게 음반을 추천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청년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코드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모던한 사운드라며 나에게 ‘모노타운’이라는 밴드의 ‘In the eye of the storm’이라는 앨범을 건넸다. 우리는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청년과 그 앨범만큼의 대화를 나눈 셈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그날 밤 나는 도미토리 침대의 2층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 일기를 썼다. 오랜만에 읽어보니 내용은 중구난방이다: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무의식중에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연결고리들이 훗날 선택의 순간에 밑거름이 되어주고 또 다른 연결고리로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세상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여는 열쇠로 행복의 문을 열었나. 아니, 나는 아직도 그 열쇠를 쓰지 않았으며,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고요한 세상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그 후에 우리는 그냥 전화기를 들고 앉아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
귀 기울인다. 행복을 여는 열쇠가 내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에. 그러면 문을 열지 않아도 나는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언제까지라도 행복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짤랑이는 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