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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소금 Nov 06. 2024

4일의 경호원

어쩌다가 4일간 경호원을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경호원 일을 해본 적이 있다. 

단 4일 동안. 


지난 5월에 나는 언니랑 치앙마이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가기 전 4월에 

용돈벌이로 단기 알바를 해봐야겠다 생각하고 

전시 알바를 지원했다. 

분명히 나는 미술관에서 하는 알바인 줄 알고 

지원했다. 

사이트 카테고리가 미술전시였고, 

근무 장소도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어서 당연하게 

전시 안내 이런 알바로 생각했다. 


그리고 

알바 화상 면접이 진행되었고 

화상 면접으로 합격해서 단 4일만 전시 알바를 

하게 되었다. 

근무복은 따로 제공되지 않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위아래 검은색 정장을 입고 

검정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근무 당일 

오전에 근무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했는데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분들이 열명 넘게 단체로 서 있었다. 


순간 당황했다. 

뭐지? 도망가야 하나...?

0.1초 정도 뭔가 도망갈까 고민하다가 

3초 정도 뭔가 이상한 알바는 아니겠지 의심하다가 

그냥 들어갔다. 


알고 보니 경호원 알바였다. 

4일 동안 나는 경호원 알바를 하게 되었다. 

미술 전시 안내 스태프 뭐 이런 건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근무 장소는 미술관이 맞지만 

정확하게는 내가 화상 면접을 본 건 

경호원 회사였고 나는 경호원으로 알바 채용되어 

미술관으로 근무를 하는 거였다. 


물론 정말 몰랐다. 

알았으면 지원하지도 않았겠지. 

나의 이 어리버리함이 나를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한다. 


나는 검정 정장 차림에 무전기를 착용하게 되었다. 

귀에 이어폰 같은 걸 꽂았다. 

무전기는 처음 달아보는 거라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히 근무 경험 있으신 다른 여성분이 

무전기 다는 법을 알려주셨다. 

스스로도 나는 참 손이 많이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경호원 회사 대리 님으로 추정되시는 분이 

따라오라고 하셔서 

다른 남성분들과 따라갔다. 

대리님이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라고 하셔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경호원 진짜 힘든 거였구나 

어찌나 시간은 안 가고 다리 아프고 피곤하던지 

체력적으로 힘든 게 느껴졌다. 

경호원분들 중에 남성분들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딱히 하는 건 없었고 

나는 정말 그냥 무슨 마네킹 마냥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역할이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과 눈이 자꾸 마주쳐서 

약간 뻘쭘했다. 

나중에는 살짝 머쓱해서 두 엘리베이터 사이 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배달 도시락이었다. 

기다란 한 테이블에서 다 같이 앉아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는데 

검정 정장 입은 남성분들 사이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여고 여대 루틴을 밟은 나는 

남자가 많은 집단에 있을 일이 살면서 정말 없었는데 

이때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군대는 가본 적 없지만 

살짝 만약 군대를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참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편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했다. 

물론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분은 없었다. 

그냥 원래 낯가림이 심한 성격인데 낯선 상황까지 겹치니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갔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그냥 일단 먹지 않으면 남은 시간을 못 버틸 것 같아서 

먹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식사를 마친 후에 

다시 근무를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가 

이번에는 라운지 앞에 서 있게 되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좀 민망하긴 했지만. 

다들 까000를 언급했다. 

사실 나는 까000가 뭔지 몰랐다.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전시 알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참으로 눈치 없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이야기했는데 

알고 보니 까000는 명품 브랜드였고 

나는 명품 전시 경호 알바를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을 때 

늦은 오후가 되니 

한 번은 엘리베이터가 열렸는데

유명한 모델들이 내렸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가 

우연히 바로 앞에서 탑모델들을 직관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와 키 엄청 크다...

역시나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티비에서 보던 분들을 바로 앞에서 보니 

약간 지금 쓰면서도 소설 같은데 

놀랍게도 실제로 겪은 실화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날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똑같이 경호 알바를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첫날만 라운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날은 

앉아서 근무하는 시간이 많았다. 


근무하는 당일 오전 출근할 때마다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그 정도로 체력적으로 좀 힘든 알바였다.  


사실 나는 그간 페어나 전시 참여하면서 

특히 코엑스 페어 같은 거 참여하거나 보러 가면 

서 있는 경호원들이 좀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해보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 앞 날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짧은 4일 동안 근무였지만 

근무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내가 앞으로 살면서 경호원을 할 일은 없겠구나 하고. 

그리고 경호원은 단순히 멋있어 보이는 직업이 아니라 

되게 힘든 직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분들은 사실 나 말고도 

4-5분 정도 더 있었는데 

거의 20명 정도가 다 남성분들이라 

같은 여성분들이 특히 반가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배우 지망생이거나 모델 지망생 혹은 연극영화과 전공 분들이 

꽤 있었다. 


뭐지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싶었다. 


온 김에 내 그림 계정을 알려드렸다. 

그리고 그림 계정이 소문났다. 

나는 분명 한 분에게만 말했는데 말한 적 없는 다른 분도 

내 그림 계정을 언급하셔서 살짝 민망했지만

어차피 그림은 알려야 하니까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마 경호원 알바는 다시 안 할 것 같다. 

되게 힘들다. 


그래도 나름 내가 평소에 쉽게 접해보지 못할 분야인 것 같아서 

의미 있는 경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이 무료할 때 

가끔 신은 내게 이런 소소한 시련(?)을 주신다. 

짧고 강렬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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