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집에 아무도 없는데 열이 달아올랐다. 입에서 끙끙 소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눈은 감아도 떠도 열기로 후끈거리고 사물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물 한잔을 가져오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퀸사이즈 침대 위에 눈만 껌벅거리며 꼼짝없이 누워있던 나는 아니, 내 몸은 갑자기 침대에서 붕- 떠오르는 것 같더니, 머리 쪽에서부터 내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지!
'죽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나는, 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계속 머릿속에서 '나는' '나는' 하면서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눈물이 머릿속까지 차올라, 얼룩지고 어지러운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단어를, 어떤 말을 당장 찾아야만 하는 것 같았다.
평상시에 나는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잘 의식조차 못했다. 생명. 불꽃처럼 살다 벚꽃처럼 간다면 좋을, 그런 게 삶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이 3차원의 현실 세계 속에서 그걸 느끼려면 '조건'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돈, 명예, 지위, 인맥,... 그런 걸 다 갖추느라 아등바등하느니 제 좋을 대로 살다가 미련 없이 가도 좋다고만 여겼다. 오히려 '안녕' 가볍게 인사하고 뒤돌아 총총. 이 3차원의 세계, 인생의 무대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쿨하게 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살고 싶어요."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내 속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몸이 갑자기 묵직한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가족들이 지천명(知天命), 나이 오십 즈음 저 세상으로 가시곤 했다. 친할아버지가 그러셨다 했고 외할아버지가 그랬으며, 우리 엄마가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이런 세상, 겁 없이 살다가 죽음이 덮치기 전, 내가 먼저 불꽃처럼 사라져 주겠다고 호기롭게 주먹을 쥐었었다. 나는 누가 겁을 주면 쫄지 않고 더 '달려드는' 용맹 무쌍한 성격이었다. 죽음이 내게 "다음은 네 차례야."라고 말하기 전에 "차례는 내가 정해."라고 선빵을 날리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어요."
느껴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난 땀이 뒷목에 흥건히 젖어든 느낌, 눈물이 눈에서 솟아 흘러 관자놀이를 지나 머리카락의 숲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 가슴에서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계속 꿀럭거리면서 올라오려는 안간힘, 무엇이든 느껴졌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살아난 듯했다. 누워서 엉엉 소리를 내면서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울었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창 밖 도로로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소리가 들렸다.
'나'라는 삶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라는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라는 마음의 집이 허리케인을 맞은 듯 부서지고, 집의 재료였던 생각과 감정의 파편들은 산산이 흩날렸으며, 무엇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게 '나'였다.
그저 몸이 조금 아팠을 뿐이었다. 바쁜 일상과 더 바쁜 만남과 더더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그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을 뿐. 그러나 몸이 아픈 것을 계기로 마음도, 일도, 돈도, 그리고 관계마저도... 하나씩 그리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황폐히 무너져 내린 집터 위에서 내 '의식'은 의외로, 담담히 서 있었다.
나는 삶의 절벽 끝으로 몰렸고 이 생, 한 번의 목숨을 놓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무(無)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나'로 살아오면서 옳다고 소중하다고 여겼던 가치들과 사람들, 상식이라고 받아들인 생각, 사상, 규칙들과, 삶을 위한 기술로 여기며 익혀왔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돈과 일과 관계. 나는 나름, 그 모든 것들의 정의(定義)를 가지고 있었다. 내 삶의 틀, 내 마음의 집. 그러나 정작 삶의 절벽 앞에 위태롭게 서있는 내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로 인해 나는, 절벽 끝에서 떨어져 내릴 참이었다. 함께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모두 버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