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파티 #박수칠 때 떠나라 #그만두는 것은 삶을 바꿀 수 있는 힘
"오늘은 제가 건배 제의를 하겠습니다. 우리 남편이 28년 간의 직장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금번에 퇴직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못 쉬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남편입니다. 정말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당분간은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한 남편에게 모두들 축하한다고 말해주세요. 건배!"
평생 동안 가족을 제외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관계나 모임을 갖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이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내가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한 나의 '퇴직 축하 파티'에서 건배사를 자처하는 모습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난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와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황하거나 미려한 말도 아니었지만 아내의 담백하고 솔직한 건배사는 고요한 나의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30년 이상을 함께 해온 나조차도 그녀의 그런 당찬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낯설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이라는 책임의 멍에를 벗고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고통을 받고 있는 내게 아내의 건배사는 살아갈 큰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짧은 순간 난 지난 28년 간의 직장생활을 잠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난 정말 행복한 놈이구나. 내겐 사랑하는 아내도, 그리고 가족도 무탈하게 잘 있음에 감사했다. 회사 덕분에 가정도 잘 돌봤고, 이 정도 살고 있으니 어쩌면 난 여전히 많은 걸 가진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고 암울했던 긴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온 맞벌이 처남 부부는 받기도 민망할 정도로 예쁜 꽃다발과 퇴직 축하 문구가 새겨진 케이크를 준비해왔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축하 문구가 제대로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며 미안해하는 처남댁에게 난 되려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로 화답했다. 처제 부부도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해 왔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조촐하게 진행된 퇴직 홈파티는 참석자들의 진심 어린 축하와 응원으로 그 어떤 화려한 파티보다도 훈훈하고 따뜻했다. 다만 아껴뒀던 발렌OO 30년 산 위스키와 고급 주류가 그날 대방출된 것만 빼고 말이다.
사실 퇴직을 결심한 후 제일 먼저 드는 걱정은 퇴직 사실을 어떻게 아내에게 전달해야 할까였다. 나도 아직 퇴직 준비가 안되었는데 아내는 나의 퇴직 얘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헤집고 다녔다. 오랫동안 주말부부 생활을 해왔던 터라 직접 보고 말하기엔 주말까지의 텀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난 용기를 내서 조용한 차 안에서 '내 사랑 OO♥♥♥'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에 전화를 하지 않던 내가 갑자기 전화를 하니 아내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퇴직 조건도 나름 괜찮고, 지금이 기회인 것 같다며 난 최대한 담담하게 희망퇴직을 신청했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내게 건넨 첫마디는 "당신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내가 그리로 갈 테니 조금 있다 보자"였다. 모든 남자가 퇴직을 얘기할 때 아내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 아닐까. 그간 수고했다는 말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난 '직장인의 별'이라고 불리는 '임시직원'인 임원을 달 때부터 나의 직장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대부분의 선배 임원들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을 오랜 기간 봐왔기 때문이다. 초라하고 비참하게 떠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회사의 예의 없음에 대해서 난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조만간 그 선배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최소한 박수칠 때는 아니더라도 초라하고 비참하게 떠나진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퇴직을 결심하자마자 이틀 만에 사택을 비우고, 사무실의 짐을 뺐다. 후임 본부장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근무 일정이 남았지만 회사와 협의를 한 후 조금 일찍 점장들과의 송별회 일정도 잡았다. '송별회'도 '송별 축하 회식'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송별 축하 회식은 후배들의 축하한다는 건배사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이런 송별회는 처음이라는 점장들이 대부분이었다. 손뼉 칠 때는 못 떠나더라도 축하를 받으면서 떠나고 싶다는 나의 첫 번째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겪어보니 갑작스러운 회사의 예의 없는 퇴직 통보에 절대 당황해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퇴직으로 인한 상심과 스트레스, 그리고 급변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인한 '무기력의 늪'을 가급적 빨리 벗어나야 한다. 현실에서 도피할 필요도 없고, 위축되거나 자존감이 떨어질 필요도 없다. 오랜 기간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이제라도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니깐.
회사의 예의 없는 퇴직 통보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들이 있다. 첫 번째가 바로 퇴직 통보를 갑작스럽게 받는다면 절대 당황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자. 내가 떠나야 후배들도 성장을 하고, 회사 조직도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장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자.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명이 있는 법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두들 그들만의 방식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박수칠 때 떠나진 못해도 후배들이 축하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떠나면 좋겠다. 후배들에게 초라하고 비참한 선배의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다. 가진 게 없어도 가진 척, 준비가 안되어도 준비가 된 척이라도 하면 좋겠다. 송별 축하 회식에서는 후배들에게 '축하해 달라'고 말하고 분위기를 방방 띄웠으면 좋겠다. 그간 회사에서 너무 많은 걸 받았고, 그 덕분에 가족도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고 말하면 좋겠다. 그래야 후배들도 남은 험난한 여정을 조금은 안심하고 다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마음이 가벼워야 하는 게 퇴직 축하 회식의 목적이다.
세 번째,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가급적 집으로 초대해 '퇴직 축하 홈파티'를 했으면 좋겠다. 퇴직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지지 말고, 홈파티를 통해서 나눠주었으면 좋겠다. 원래 짐은 나눠져야 가벼운 법이다. 인생의 전반전을 무사히 끝냈으니 축하하러 오는 사람도 가벼운 선물을 준비하고, 파티를 주최하는 사람도 축하 분위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간의 직장생활의 노고와 헌신을 돼 새기고 돌아보는 자리가 되면 좋을 것 같다.
네 번째,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강제 휴무' 기간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여유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충분히 재충전을 하면서 그간 직장생활의 여독을 풀고, 재충의 시간을 가지면서 인생 후반전을 계획하면 된다. 서두르지 않아야 실수도 덜 하는 법이다. 그간 못했던 운동도 해보고, 리프레쉬 차원의 여행을 떠나 힐링의 시간도 가져보자. 특별 휴가 기간에 충분히 즐기면서 휴식의 즐거움과 스트레스리스(stressless)의 편안함을 그냥 느끼면 된다.
그만두는 것은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우리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만두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필요한 힘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만두는 것은 힘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의 손실을 막음으로써
자신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시 할당할 수 있다.
- 리치 칼가아드, ‘레이트 블루머’에서
아쉬웠지만 후회는 없다. 할 만큼 했으니 물러나는 것이 도리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비우면 다시 채워지는 게 바로 인생의 순리 아니던가. 끝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인생은 행동하기에 적합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깐 긴장을 풀어라. 당신은 뒤처지지 않았다. 이르지도 않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대에 잘 맞춰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