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제일 하고 싶었던 것

#자유인 #자연인 #수염 #2차 성징 #할리우드 스타 #취업규칙 #변화

by 미스틱

퇴직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수염을 기르는 것이었다. 국내 기업의 정서상 회사를 다니면서 남성 직원이 수염을 기르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아마 지저분한 남성들의 수염을 깎게 함으로써 용모적인 단정함을 주기 위한 대고객 서비스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퇴직하자마자 제일 먼저 수염을 길렀다. 내게 있어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오랜 염원이기도 했고,

직장생활을 벗어나 자유인인이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했다. 또한 퇴직이라는 심리적 충격(?)을 외모적인 변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상의 루틴은 바로 면도를 하는 일이었다. 30년 이상의 면도 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날카로운 오중의 면도날이 휩쓸고 지나간 피부에는 늘 아픔의 상처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면도날의 공격에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고, 그냥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피부에 뾰루지가 돋는 날이면 더욱 상흔이 심했다. 난 평소에서 피부가 예민해 면도로 인한 상처와 염증이 많았으며, 면도 후에는 늘 피부가 욱신하고, 따끔해서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춥고 건조한 겨울철에는 수염이 더욱 빳빳해져서 면도날로 인한 상처가 더욱 자주 발생했다.




직을 한 이후에야 나는 겨우 면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만 수염을 깎지 않아도 장비처럼 덥수룩하게 얼굴의 하관을 덮는 수염들의 생장력을 보면서 하루하루 수염의 길이를 눈과 손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염을 깎지 않으면서 삶이 너무나 평온해졌다. 날마다 일어나서 하는 일상의 전쟁 같은 루틴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는 수염 기르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아마 덥수룩한 수염이 보기에도 지저분하고, 얼굴 가까이에 대고, 수염으로 문지르는 장난이 싫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내가 퇴직 후 수염을 기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내가 행여나 심리적 좌절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이런 관심과 배려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국내 기업에서는 수염 깎기를 거부하다 인사상 불이익을 당해서 법의 심판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2014년 9월 A항공사 비행기장으로 근무하는 B 씨가 턱수염을 기르자 상사가 취업규칙 위반을 근거로 면도를 요구하자 B기장은 신체적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불응했고, 급기야 회사는 그의 비행업무를 정지시켰다.


B 씨는 이와 관련해 회사의 비행정지 조치가 부당하다며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였고, 지노위는 B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A항공사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 요청을 하였지만 중노위 또한 B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A항공사는 대법원에 중노위 재심판정 취소를 요청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대법원 또한 B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의 판결을 요약하면, 취업규칙이 근로자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헌법을 포함한 상위법령 등에 위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개인 용모의 다양성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를 고려할 때 직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이 반드시 고객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타인에게 혐오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단정하게 기른다면 오히려 고객의 신뢰도나 만족도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판결이었다. 결론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염을 기르는 것은 법적으로도 합법이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수염은 경쟁자에게 겁을 주고 싸움의 우위를 확보하는데 유용한 도구였다고 한다. 수염이 무성하면 입과 얼굴이 커 보여서 더 위협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찰스 다윈의 자웅 선택(Sexual selection) 이론에 따르면 영장류 수컷들은 번식상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털을 진화 시켜 왔다고 한다. 보다 화려하고 매력적인 털을 가진 수컷일수록 자신의 새끼를 낳아줄 암컷의 선택을 받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이성에게 성적 어필을 위해서인 것만은 아니다. 잠재적인 동성의 경쟁자들에게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기르기도 한다. 염국 노섬브리아드대학 연구진이 남녀 4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성은 수염이 덥수룩할수록 강인한 인상을 받는다는 응답이 많았는데 수염을 기른 남자는 말끔하게 면도한 남자에 비해 강인하고, 공격적이며, 지배적인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다.


화면 캡처 2021-12-07 154212.png
B612_20211207_121803_486.jpg
My Ideal Image(Pixabay) vs My Real Image


퇴직을 하고, 오십 대가 되어서야 겨우 남성의 2차 성징인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 내 바람으로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멋있고, 남성적인 멋이 물씬 풍기는 수염을 기르고 싶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그런 멋진 남성의 모습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모에 맞게 꾸미기 위해서 다시 시작되는 번거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온전하게 이런 번거로움을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멋있지는 않지만 수염 기르기를 통해서 와인처럼 숙성되어 가는 멋진 1막 2장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싶다.


keyword
이전 07화예의 없는 퇴직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