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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시간의 통제권
유통산업발전법(DIDA)에서 정하는 의무휴일이 있기 전까지 대부분의 대기업 오프라인 유통업체 매장은 주말 없이 일을 해야 했고, 급기야는 24시간 심야영업까지 일을 해야 했다. 주말은 당연하고, 주중 휴무까지 반납해서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루 평균 만 명 이상의 고객이 방문하는 매장에서 근무하다 보면 각종 사건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특히 주말 영업 매출 비중이 큰 유통업체의 특성상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바로 주말 동안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유통업체 근무 초기에는 주말 동안 매장을 찾는 가족 고객들을 보면서 난 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매장을 찾아서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내 아이들이 몹시 보고 싶었다. 물론 평일에 쉬는 장점도 있었다. 놀러 갈 때 교통도 혼잡하지 않고, 놀이공원이 입장료도 싸고,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남들처럼 평온한 주말의 일상을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주말 근무도 문제였지만 연고지를 떠나 낯선 타지에서 근무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점장, 본부장 시절 십 년 이상을 서울, 대전, 부산, 울산 등 낯선 타지를 떠돌면서 홀아비 생활과 주말부부 생활을 했었다. 혼자 지내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타지로 떠날 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 애가 연고지 복귀 시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과의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는 삶과 시간의 통제권을 다시 돌려받고 싶었다.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자원은 바로 사람이다 - 피터 드러커, 《경영의 실제》 중에서 -
'비전 상실 증후군'에 시달리다
카네기는 천천히 끓어오르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는 무의식 중에 서서히 적응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겨서 죽는다는 '비전 상실 증후군'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안일하게 하루를 보낸다. 당장 먹고살만하니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동료나 후배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가 바로 '회사에 비전이 없다'는 말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작금의 회사 사정을 볼 때 회사가 절대 비전을 줄리는 절대 없다. 회사의 비전은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업무적이든 개인적 비전이든 말이다.
최근 코로나 확산에 따른 온라인 비즈니스가 가파른 성장을 하고, 대면 서비스 및 판매 인력 축소가 지속되다 보니 오프라인 유통업체의 매출이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마이너스 영업이익으로 전환되면서 금융권의 신용도 하락의 우려마저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회사는 모든 운영의 초점을 재무개선에 둠으로써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기 시작했다.
영업이익을 단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재무적 챌린지가 강하게 진행되었는데 그중 가장 강도 있게 진행된 것이 바로 인건비 축소였다. 인력을 비용을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암묵적으로 버짓을 축소하기 시작했고, 아웃(Out)은 있어도 인(In)의 과정은 없애다 보니 갈수록 점포의 인력 경쟁력은 악화되었고, 급기야 인건비 동결이 수년간 진행되면서 견디다 못한 인재들이 대거 경쟁사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인재들은 모두 떠나고, 갈 데 없는 직원들만 남았다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인건비에 이어 마케팅, 상품, 이커머스 등 모든 가용한 비용들을 감축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유지보수 비용까지 동결시킴으로써 현장의 시설 노후화는 갈수록 심해지게 되었다. 경영진의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팽배해지기 시작했고, 회사의 앞날에는 암울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기업의 전략은 제한된 자원을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의 부재는 더욱 심화되었다. 비용 중심의 단기적인 전략에 급급해 장단기적인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고 실행하지 않으니 직원들이 그리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처럼 기업의 핵심가치는 사람을 키우고, 그 사람과 함께 가양한다는 기본적인 핵심가치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유통은 시스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한다는 것은 유통인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사람을 불신하다
본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내 손으로 부하 점장들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암묵적으로 진행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노동법을 보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관리자를 내보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그러한 일들을 마치 당연한 듯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권고사직을 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랜 시간 매와 같은 감시의 눈으로 관리자를 평가하고, 부족한 근거를 만들어내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유통업의 특성상 이런 일을 이딴 식으로 하면 절대 안 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분위기는 본부장 기간 내내 지속이 되었다. 필요하면 공식적으로 희망퇴직을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왜 이런 악수를 두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상자뿐만 아니라 대상자를 선택해야만 하는 나 또한 정신적 충격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제대로 된 준비와 배려가 없이 진행된 이러한 과정은 아름다워야 할 마무리가 추악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상자들 일부가 수용을 하지 않고, 단체행동을 통해 노동부에 제소까지 하게 된 것이다. 회사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은 언젠가 자신도 그 칼에 피를 묻혀야 함을 알아야 한다. 오랜 기간 회사를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한 관리자들을 아름답게 회사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를 해야만 한다. 이런 회사 분위기가 어쩌면 나의 퇴직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