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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13. 2023

생각의 한계를 느낀다면?

#에코챔버효과 #필터버블 #어휘력 #그림이론 #문해력 #비트겐슈타인

어휘력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사고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어휘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니까요. 담을 그릇이 없는데 무슨 내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식인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걸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언어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했고, 조지 오웰 역시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표현할 단어를 못 찾으면 나중에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휘로 표현할 수 있는 것까지가 아는 것이지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요. 그러니 어휘력이 빈약하면 사고력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지요. - 강원국의 '공부하면 뭣하니' 중에서 -


2년 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표현할 단어를 못 찾는 것이었죠. 바로 어휘력이었습니다. '언어유희' 수준까지 구사하는 몇몇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 정도밖에 어휘력이 없었나라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들었죠. 좋은 글들은 몇 번씩 곱씹어 되새김질도 해봤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똥폼을 잡으면 어느새 내 머리는 완전 '리셋' 상태가 되어 버리고, 관성항상성의 법칙에 따라 이전의 상태로 돌아와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패턴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죠.


어휘는 '어떤 특정한 범위 내에서 사용되는 낱말의 총집합'을 의미합니다. 낱말은 '저 홀로 쓸 수 있는 말'인 반면 어휘는 '낱말들의 무리'를 말하는 것이죠. 낱말을 안다는 것은 낱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아는 것이지만 어휘를 배운다는 것은 이러한 낱말들의 연결된 맥락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사전에 등재된 낱말의 수가 50만 개, 실제 사용하는 낱말 수가 20만 개라고 하니 우리가 실제로 아는 단어는 새 발의 피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셰익스피어의 책을 보면 약 18,000개의 단어와 어휘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언어에서 어휘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책을 읽거나 신문기사를 볼 때 평소에도 아는 단어나 어휘를 발견하면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단어가 말하는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그 단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한자 세대인 나조차도 어떨 때는 그 낱말과 어휘가 말하는 정확한 뜻을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한자를 배우지 못한 요즘 MZ 세대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저는 글을 쓰면 쓸수록 제가 구사하는 어휘력이 엄청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0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불리는 루티비히 비트겐슈타인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조립되어 있다'라고 말하며,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주창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세계는 하나의 그림이며, 이 그림은 언어로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림과 언어의 구조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은 넬슨 굿맨(Nelson Goodman)과 윌리엄 미첼(William Mitchell)과 같은 미학 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굿맨은 그림과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첼 또한 그림의 성격을 띠지 않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언어의 성격을 띠지 않는 그림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책이 있다'라는 명제는 책상 위에 책이 있는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고서는 이해가 될 수 없다는 뜻이죠. 세계를 그림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말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오해의 여지없는 명확한 말만 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대상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어와 앎의 관계를 논리 실증적으로 밝히려 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면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인 것 같습니다.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보고 말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이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라는 의미도 비트겐슈타인의 말과 연결 지을 수 있어 보입니다. 이렇듯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우리들이 어떤 현상에 대해서 직접 보지 않고, 언어 표현만 듣고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앞의 얘기를 종합한다면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 내가 아는 소통 방식의 한계, 내가 사용하는 어휘력의 한계가 바로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처 : Pixabay


SNS의 발달로 읽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내용을 심도 있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퇴보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오히려 문해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해력(文解力)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일 또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검색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흘'이란 단어죠. 우리 세대에게 이 말은 3일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자주 쓰였지만 요즘 세대들에게는 '4일'의 뜻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 해석의 장벽조차도 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작가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사물의 상태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휘에 대한 깊은 지식과 문해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상, 사랑의 감정, 삶의 통찰과 깨달음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의 뜻을 대충 알거나 제멋대로 어림짐작하는 경우에는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단어 몇 개만 나와도 맥락적으로 연결 짓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문해력의 가장 기본은 어휘력입니다. 물론 한자를 알면 더 쉽게 문해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그룹들 하고만 소통하는 경우가 늘다 보니 편향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에코 챔버 효과(echo chamber effect)'라고 부릅니다. 에코 챔버는 인공적으로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방으로 자신이 말하면 에코, 즉 메아리가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회관계망 서비스 등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에코 챔버 효과는 더욱 커진다고 합니다. 에코 챔버 안에서 진실을 저 멀리 있고, 자신의 신념과 동일하지 않으면 중요한 정보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하죠.


또한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서 어휘력이나 문해력이 당연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는 자신이 보고나 관심을 기울이는 콘텐츠만 계속 추천되는 영악한 알고리즘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신이 보거나 클릭하는 영상을 근거로 이와 유사한 영상을 계속해서 맞춤형 정보를 추천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알고리즘은 '필터 버블(filter bubble, 정보 여과 현상)'로 연결되고, 필터 버블은 보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더욱 편협하고 편향되게 만듭니다. 이 용어는 엘리 프레이저의 《생각 조정자들》이란 저서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로그아웃을 해야 이런 필터 버블의 악순환 고리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은 책을 읽을 때도 이해의 깊이가 다르며 소통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는 세계, 즉 어휘력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어휘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양서를 많이 읽고 자신만의 글을 많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찾아보고 메모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장하고 자주 활용을 한다면 어휘력이 더욱 향상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 글이 길다고 이웃분들이 많이 말씀하시는데 그건 바로 어휘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도 계속 의식해서 읽고 쓰고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가 아는 세상의 한계도 커지고 풍부해지지 않을까 오늘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비트겐슈타인 형님의 명언을 다시 한번 외쳐봅니다.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다!

루트비히 비스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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