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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19. 2024

원래는 법대에 가고 싶었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수학과 물리를 못한다는 현실을 아주 잘 깨달은 나는 이제는 문과 쪽에서 진로를 찾아보기로 했다. 당시에 S여상에서 학교 홍보를 하고 갔는데 아주 좋아 보였다. (역시 팔랑귀였다....) 엄마는 그 소리에 펄쩍 뛰면서 내 딸은 인문계 일반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당시 국졸로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니트 만드는 일을 했던 엄마는 딸에게만큼은 공부를 시키고 싶으셨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공부하고 싶어 야간에는 중학 과정을 공부시키는 공장에서 일을 하니 외할머니가 와서 다시 잡아갔다고....) 


아무튼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냥 평범하게 공부를 했다. 그냥 공부하면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온갖 떡볶이 집은 차례차례 날마다 바꿔가면서 들렸고 신사리에 가서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야자 시간이었다. 공부하다가 같이 저녁 먹고 수다를 와글와글 떨다가 다시 공부하고 다시 우르르 깜깜한 학교를 몰려나오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십 대의 귀한 시간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1학년, 2학년이 되도록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막연했는데 고3이 되던 그 겨울 책 한 권을 만났고 그 책의 저자는 내 롤모델이 되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She was my inspiration 정도가 되겠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긴 한데 그 책을 나는 너무너무 감명 깊게 읽었다. 너무너무라는 두 번으로는 부족할 만큼 빠져들어 그 길로 나는 내 꿈은 이제 이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책은 바로 재미교포 변호사 에리카 김의 자서전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근사했다. 어려운 사람을 법과 끝내주는 말빨로 도와주는 정의의 변호사!!!! 그녀의 로맨스 스토리도 멋졌지만 진정한 걸크러쉬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만연한 당시 미국 사회에서 명문대를 수석 졸업하고 어려움을 개척해 나가는 그녀는 진짜 롤모델이 될 만 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책을 판단하기에 나는 피끓는 10대의 학생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BBK 사건과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을 때 내 눈과 귀를 의심했고 설마설마 끝까지 버티다가 마지막에는 극심한 배신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법대를 가겠다는 열망으로 그 한 해를 미친 듯이 공부에 빠져서 보냈다. 당시에는 수능 성적 300점이 넘으면 서울대 합격권에 들었다. 수능이 미치도록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다른 과목은 대강 만점에 가까운데 수학이 십 점 대였다. 내 수능 모의고사 총합은 290점 정도 되었다. 필사적으로 공부한 끝에 성적은 꾸준히 올랐고 마지막 모의고사 때 320점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이제 서울대 합격권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능은 나를 배신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수능의 방향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나는 모의고사가 어렵건 쉽건 점수의 변동이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울수록 유리했는데 그 해 수능은 너무나 쉬웠다. 답이 뻔하게 보일 정도로 너무 쉬워서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바람에 틀린 문제들도 꽤 많았다. 중하위권의 다른 아이들은 100점씩 올랐는데 나는 고작 40점도 채 오르지 못한 360점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좌절했다. 법대는커녕 서울대 하위권도 위태로웠다. 함께 공부하던 다른 친구는 경희대 법대, 연대 공학부로, 그리고 내 절친은 서울대 치의학과로 갔다. 예상과 비껴간 성적표를 받아 들자 갑자기 법대에 대한 열망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일까.


역사도 좋았고 영문학도 좋았다. 여전히 마지막까지 잡았던 법학도 아주 제외시키진 않았다. 심지어 갑자기 음악도 공부하고 싶었다. 각 분야를 전공한 분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세 분은 세 학문이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라고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학문의 분류를 보니 정말로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가운데 대학커트라인이 발표되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갑자기 아빠는 교대라는 선택지를 꺼내셨다.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은 곳이었다. 고3 담임 선생님은 한사코 반대를 하셨다. 네가 교사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이나 정말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당시 국어를 너무나 잘 가르쳐 주시고 문제집도 많이 집필하시던 젊은 담임 선생님은 늘 후회스러워 보였다. 결혼도 직업도. 나를 예뻐해 주시던 교감 선생님도 교대 진학을 반대하셨다. 내게 그냥 기왕 합격한 고대를 가던지 차라리 재수를 하라고 두 분이서 강권을 하시는 통에 졸업하는 날까지도 나는 정신이 없이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전공을 정할 때도 완전히 다른 분야들을 가져다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고 눈앞에 잡힐 것 같았던 서울대를 놓친 내게 찾아온 것은 우울함과 열등감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는 연대 의예과에는 장학생으로, 그리고 동시에 서울대 치의학과에도 안정권으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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