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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Sep 14. 2024

여러 우물을 이리저리 동시에 파는 요령

결혼 전에는 퇴근 후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어서 하고 싶은 일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그리고 출산 후에는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내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게 깊숙히 넣어두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나를 가까운 신랑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복직하고 나서부터 조금 용기를 내어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함이었다.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하게 되면서 나를 좀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영어공부였다. 영어 말하기는 문장 연습과 발음 연습의 두 부분으로 나눠서 했고 그다음에는 듣기 연습에 한동안 집중했다. 그렇게 영어 회화를 조금 익히면서 코로나로 인해 반강제로 집에 있으면서 영어 원서를 한동안 읽었다. 종일 집에 앉아서 책을 읽고 필사하면서 지내다가 드디어 재택의 시간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학교에서 교원학습공동체로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멘토 선생님께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나머지는 알아서 과제로 채워오는 것이었다. 혼자서 숙제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그렸다. 코로나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무렵이라서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아이들 공부 봐주는 일이 끝나고 하루가 정리되는 밤 10시 정도에 나는 그림을 한 시간씩, 두 시간씩 그렸다. 하도 열심히 그려서 시력이 좀 나빠져서 그림 그리는 용도로 돋보기도 맞추었다.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 드디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려 10kg이 쪄 버렸는데 옷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원래 있었던 비염은 그러려니 했지만 요통과 생리통, 요실금까지 40대 초반이 겪기엔 좀 아닌 증상들까지 나타나 힘들었다. 살기 위해 운동한다는 선배 언니들의 말이 떠올랐고 서서히 필라테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져놓은 영어 공부는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쏟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흐름은 이어갔다. 말하기 연습은 명시적으로는 5분, 책 읽기는 주 3회 30분 정도로 잡았고 그 외 평일에는 운동을 하는데 매일 30분씩 시작해서 점차 시간을 늘려나갔다. 마지막에 바디 프로필을 찍을 때는 최대 2시간까지도 운동에 힘을 쏟았다.


필라테스를 30분씩 1년가량 했었다. 그만큼 나는 운동 습관을 잡는 데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매일 한 것도 아니고 주 2~3회씩 하다가 나중에 서서히 간격을 좁혀가면서 시간을 5분 혹은 10분 정도로 늘리고 한참 그대로 유지하는 식으로 했다. 1시간씩 운동을 꾸준히 하게 되는 데는 2년이 걸렸고 완전하게 주 6회 운동 습관을 잡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운동을 하기 전, 영어 공부를 하던 시절 사이에 간간히 피아노를 때가 있었다. 보통 방학이 시작될 무렵 3개월 정도 집중해서 레슨을 받고 개학하면 쉬고 다시 시작하는 패턴이었다. 그렇게 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피아노를 1년 정도 쉬었다. 그러다 작년에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면서 서서히 다시 불이 타올랐다. 여전히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일주일에 2~3번은 연습실에 가서 연습을 하고 온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밤에 나갈 때도 있고 가끔 아이들 학원이 꽉 차서 늦게 오는 날이면 퇴근할 때 들려서 후다닥 연습하고 집에 와서 밥을 차려 줄 때도 있다.


피아노 연습에 서서히 시간을 늘려갈 무렵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은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과 생각을 부어야 가능한지라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리는 횟수가 줄었다. 그와 동시에 온라인 모임에 참석하는 수가 늘었다. 온라인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해 보기도 하면서 나와 아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횟수를 조율했다. 주 1회는 괜찮고 간혹 한 번 정도는 괜찮지만 그 이상 할 경우는 아이들과 생활하는데 흐름이 깨졌다. 더 듣고 싶은 강의가 있고 모임이 있어도 꾹 참는 수밖에 없다.


우선은 새로운 일을 할 때 워밍업의 시간을 길게 가졌다. 적응하는데 천천히 오래 조금씩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존의 것을 가늘고 길게 유지하면서 새로운 일에 조금더 주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돌려 막기를 하는 중이다. 한 가지 내가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거기에 집중해서 어느 정도 흐름을 익혀둔다.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일 년 정도 서서히 시간을 들여서 익숙해지면 처음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다. 운동은 매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잡혀서 급할 때는 20분, 여유가 있을 때는 한 시간 반 정도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서 한다. 한 번 유지기에 들어간 몸은 조금 체중이 증가하고 살이 쪘어도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어 공부도 매일 조금씩 하는 것은 유지 중이다. 전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 듣기 연습을 하거나 필사를 하지 않아도 조금씩 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가장 고난도는 피아노이다. 워낙 몸을 쓰는 것이 둔하고 귀가 약하다 보니 내가 내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음악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손가락 힘 빼는 기초부터 가는 중이니 최소 2~3년은 더 노력을 해야 가능하겠다고 생각한다. 2주 후 미니연주회가 있기 때문에 당분간 2주는 피아노가 최우선이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일이 생기거나 비중을 실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일단 그것을 중심으로 둔다. 그 축을 중심으로 다른 자잘한 것들을 소소하게 배치한다. 수채화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글쓰기는 글로 성장연구소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시간을 배분하고, 영어공부는 함께 하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한 달과 석 달 단위로 끊어서 시간을 조절한다. 큰 구슬을 먼저 넣어야 작은 구슬들을 넣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도 짜 본다.


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일정이다.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여럿이어도 아이들의 일정을 최우선으로 빼놓고 그 사이에 넣어둔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축은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 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 나는 피아노 연습을 제일 많이 하고 싶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우선으로 두었다. 어쩌면 피아노 연습은 제일 적게 할지도 아니면 아예 못할 수도 있다. 공연을 잘 해내고 싶지만 망쳐도 괜찮다. 불완전함과 미완성된 곡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나 하나의 몫이면 된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지금 뿐이기에 아무리 중요한 연주회가 있어도 미뤄둘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추가적으로 따라오는 정서적 안정감이야 말로 또 다음 일을 추진해갈 수 있는 바탕의 힘이 된다는 것을, 이리저리 또 겪어 보면서 알았다. 그래서 이 글도 사실은 미리 써 둔다. 시간이 살짝 여유 있는 오늘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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