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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Oct 02. 2024

6개월, 영어에 올인할 수 있었던 시간

영어교사심화연수과정은 경쟁이 꽤 치열했다. 6개월간 본봉은 그대로 나오면서 무료로 숙박을 제공받으며 공부만 하는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했는데 월급도 어느 정도 받으면서 공부만 할 수 있다니, 정말 너무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것만도 좋은데 거기에 더해서 더 좋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어권 국가에서의 연수기회이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3주는 미국이나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고 이 부분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만큼 자격요건도 상당히 높았다. 영어 관련 연수를 많이 들어야 했으며 영어 교사로서의 경력 점수도 필요했지만 텝스와 같은 공인 영어 시험 점수도 필요했다. 이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공인영어시험을 보았다. 처음에는 난감했던 점수가 나중에는 제일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갔다. 한 번은 점수가 없어서 떨어졌고 두 번째는 6학년 담임이었는데 아이들을 놔두고 갈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러니까 꼬박 1년을 기다리고 준비를 한 것이다. 심지어 영어 연수는 유효(?) 기한이 2년이라서 그 전에 많이 받았어도 다시 리뉴얼해야했다.


그렇게 애써서 준비를 하고 노력을 기울인 끝에 합격을 해서 갔는데, 실제로는 예상과 달라서 조금, 사실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당연히 중등 선생님들과 같이 수업을 들으며 실력을 보다 향상 시키고 초중등 간의 연계도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중등과 초등 영어교사가 같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수업과 생활은 별개로 진행했다. 중등영어교사들의 실력을 초등영어교사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굴욕적이지만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 곤란했던 것은 정말 다양했던, 선생님들의 영어 실력 차이였다. 나는 나 보다 잘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몇몇 지역은 정말 치열하게 점수를 쌓아서 왔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경력 점수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고 그냥 6개월간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신 분들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잘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영어 실력이 성장할 텐데, 영어로 몇 마디 하다가 나중에는 한국말로 말해 버리는 것이 더 편한 분들 사이에 있으니 답답함만 늘어날 뿐,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칙은 캠퍼스와 숙소 내에서도 영어만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 실력자라면 상관없이 있었겠지만 같은 초보자끼리 계속 말을 해 봐야 별다르게 실력을 성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기에 조금 더 힘들었다. 이 부분은 beginner 레벨에 있는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수준별로 클래스를 구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기에 일정도 녹록치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오후 내내 수업이 진행되면서 저녁 식사 후에도 evening activity라는 이름으로 밤까지 앉아 있는 날도 많았으니 정작 복습을 하거나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시간은 부족했던 것이다. 매주 서울과 청주를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지내면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 비슷한 나이 대의 선생님들도 많았는데 그래서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기꺼이 지방까지 갈 정도로 친해졌다. 기쁨만 있던 것은 아니고 민감한 부분이라 자세히는 쓸 수 없지만 슬픈 소식도 있었다. 몇 개월을 한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다.


사연이 많았던 5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미국 국경 지역인 몬타나 주의 미줄라 시로 가게 되었다. 대학이 있어서 그래도 좀 도시다운 곳이라고 하지만 정말 시골 같이 한적한 곳이었다. 그래서 면세 혜택이 주어졌고 또 다양한 레포츠 활동을 주말마다 즐길 수 있어서 또 좋았다.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미국에서 지내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수업 때문에 사정 상 같이 간 선생님들과 수업을 듣기는 해야 했지만 외국인들과 영어로 직접적인 소통을 해야 하는 순간은 훨씬 늘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생활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부분만큼은 달랐다. 한국어라는 이미 공통의 베이스가 깔린 사람들과는 아무리 해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한국에서 공부해도 회화만큼은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과 해야 하는 것이 조금 더 절실한 이유이다. 아니면 최소한 교포 수준으로 영어를 더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이거나.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갔기 때문에 그 절실함을 알아서 미국에서의 3주를 알차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오신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영어로 샌드위치를 주문할 수 있으면 실력이 어느 정도로 올라간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냥 다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이다. 빵을 고르고 어떤 사이즈로 할 것이며 어떤 소스를 넣을 것인지. 어떤 내용물을 넣고 굽기를 어느 정도 할 것인지 등등 다양한 질문에 자유롭게 대답하려면 듣기도 말하기도 상당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다른 동생은 "우리는 이제 샌드위치는 아무렇지도 않고 환불까지 받아낼 수 있으니 괜찮은 거 아냐?"라면서 쿡쿡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그렇기에 미국에 가서 제일 크게 배운 것은 사람을 사귀는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영어가 서로의 모국어가 아님에도 진짜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어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진귀한 경험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낯선 문화와 관습에 당혹해하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들을 보냈다. 가능하다면 이렇게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더욱 진해졌다.


동시에 케리스에서 의뢰를 받아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를 여러 번 감수하기도 했다. 영어 과목으로 수업 개선 연구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을 하면서 이력을 쌓아갔다. 나중에는 심의위원 의뢰까지 받을 정도로 안팎으로 나름의 실력과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아마 그 과정이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초등학교 영어교과서에 이름이 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귀국 후, 나는 조금은 성급하게 결혼을 했고 곧이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쌓아 올린 영어교사로서의 경력은 희미해졌다. 역시, 육아와 휴직 중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아프게 깨달았다. 다양한 교육기관에서의 의뢰와 연락은 점차 뜸해졌고 나중에는 완전히 끊겼다. 다른 부분보다 그 부분이 서글펐다. 복직을 하면 처음부터 다시 땅을 파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더 냉정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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