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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Oct 03. 2024

뜻하지 않게 번역가의 길을 걷다

첫째를 낳고 이어서 세 명의 아이를 더 낳게 되었다. 격년으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남들이 쉽게 말하는 애국자는 아니고 애국하려고 낳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넷이 되었으니 이제는 복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셋째 때부터 자명했다. 그런데 집에는 소득이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육아휴직 수당은 일 년 동안만 주어졌고 그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의 월급이 주요 소득원이었던 것이다. 예술가인 신랑의 수입은 매우 불규칙했고 없는 경우도 많았다. 신랑의 소득에 의지해서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다가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기로 했다. 예전에 영국 에그몬트 출판사의 동화책 시리즈를 번역한 적이 있어서 그 경험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처음에 의뢰를 준 곳은 자꾸 월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지막에는 150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떼어먹고는 잠수를 탔다. 그 번역회사는 주소지를 바꿔가면서 다양한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번역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소송을 하고 싶었으나 소송을 하려면 상대방의 주민번호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번역회사 사장의 주민번호를 수는 없었다. 처음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나의 잘못도 있었다. 속상했지만 그냥 인생 교훈과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두어 곳의 번역회사와 일을 했는데, 의뢰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서 잘 될 때는 교사 초봉 수준 이상으로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삶은 몹시 힘들었다. 번역 의뢰는 전화로 온다. 전화를 놓치지 않고 항상 받으려면 신경을 써야 했다. 의뢰를 받은 후에는 원고를 열어 보고 기한과 분량을 확인한 후,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인지 파악을 한 다음에 답변을 한다. 보통은 하루 이틀 내로 빨리 해야 하는 의뢰인지라 답변도 빨리 해야 했다. 


작업은 주로 아이들이 잠든 시간인 밤에 이루어졌다. 혹은 낮잠 시간이거나. 한쪽 구석 책상에서 책상용 라이트를 켜 놓고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울면 가서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면서 그렇게 새벽까지 일을 마치고 나서야 잠을 잤다. 간혹 마감이 촉박한데 너무너무 피곤할 때는 웹툰을 봤다. 잠이 어느 정도 쫓겨지면 다시 일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졸리면 웹툰을 보고 다시 일을 했다. 깜빡 엎드려 자고 나서 다시 일을 하면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싸구려 조립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계속 켜놓으니 과부하가 걸려 갑자기 펑 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면서 전원이 나간 경우도 있었다. 그때도 화재가 날까 걱정이 되는 것보다 그때까지 애써 작업해 둔 파일이 날아갔을까 싶어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하드 드라이브는 무사해서 파일은 건졌다.


늘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어떤 성형외과 홈페이지를 통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이렇게 큰 건의 경우는 샘플 번역으로 확인한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나중에 작업이 완료된 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받은 돈을 토해낸 경우도 있었다. 한 달에 걸쳐서 작업한 경우라 매달 백 만원씩 삼백을 토해내는 경험은 좀 뼈가 아팠다. 이 때는 내게 다시는 의뢰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회사 측에서는 그냥 안 맞는 것이라면서 쿨하게 넘어가고 계속 의뢰를 보내왔다. 가끔은 지난번 번역이 마음에 들었으니 꼭 동일한 번역가로 해달라고 요청을 받아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당연하게도 속상했고 긍정적인 피드백이 오면 물론 기뻤다. 대부분은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아무런 추가 요청이 없으면 잘 된 것이라 안심이었다. 밤늦게 자는 안 좋은 습관은 이때 만들어졌다. 몇 년을 이렇게 일하고 나니 12시 이전에 자는 것이 아직도 어렵다.


번역을 하면 영어 실력이 많이 성장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주로 한영 번역의뢰가 많이 들어왔는데 주로 논문 초록이나 계약서, 유학 서류, 이력서 등이었다. 물론 하다 보면 자동으로 영어로 재생이 되긴 하지만 활자 작업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은 소통이 관건인데 단편적인 글들을 빠르게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고 재미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논문 초록에 사용되는 어휘나 문장 형태는 일상적인 것과 매우 다르고 복잡하다. 그러다 보니 전문 용어 사전과 관련 논문들을 찾아가면서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한국어 문법이 틀린 문장들이었다. 긴 문장 속에 주어와 목적어가 불분명하거나 여러 개가 혼재되어 있어 앞뒤 내용을 몇 번이고 읽어가면서 재해석 한 후 해체하고 조립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인 경우도 많아서 난감했다. 영어든 한국어든 잘 쓴 글은 간결한 문장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렇게 길어지면 번역을 하다가 나중에는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정말 하다 하다 안 되는 경우는 작성자에게 물어봐서 대답을 듣고 다시 질문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는데 이 부분이 제일 번거로웠다. 한 번에 끝낼 수 없어 계속 마음 속에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을 나눈다. 작업을 한 번에 끝내야 다른 일을 하는데 계속 관련 지식을 담고 있어야한다. 빠르면 몇 시간 길게는 며칠에 걸려 답장을 받으면 이전 작업 내용을 다시 떠올려 작업해야 하기에 이래저래 난감했다. 주어와 서술어와 목적어가 분명하게 기술된 한국어 문장을 바르게 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좀 충격이었다.


번역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대가는 정말로 적었다. 집중해서 했어도 다시 훑어보면 또 어색하거나 틀린 부분이 나왔다. 자꾸 보다 보면 5천 원짜리 짧은 의뢰도 두 시간씩 걸릴 때가 있었다.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금액인데 힘은 정말 많이 들었다. 내용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글자 수로 가격을 책정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괜찮겠다 싶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책이나 기사 같은 영한 번역이라면 조금 의미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의뢰를 받아하는 한영번역은 정말 힘든 일이다. 번역 기계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번역을 근근이 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무급 휴직 기간을 버틸 수가 있었다. 너무너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언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의 언어 안에 담긴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과정이었다. 다만 번역에만 올인할 수 없고 0살, 2살, 4살, 6살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 잠을 줄여가며 하는 그 시간의 무게가 나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복직을 하던 날 나는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곧 번역 회사에는 이제는 일을 할 수 없겠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연락을 했다. 비록 번역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려운 시절을 잘 보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회사였다. 담당 직원들과도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정이 많이 들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지금은 어떻게 그 많은 번역들을 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영번역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훌륭하신 분들이다.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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