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로 빨강머리 앤을 읽고 나서 아름다운 아이, Wonder를 읽었다. 이 책을 읽자는 공고를 올리자 세 배 수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원서 읽기는 소수 정예로 많아야 열 명 남짓 생각했는데 단톡방 하나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으면 좀 정신이 없고 산만하겠다고 여겨졌다. 큰맘 먹고 방을 두 개로 쪼갰다. 책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쉬웠다. 빨강머리 앤에 비하면 모르는 단어도 딱히 없었다.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당시에 쓴 글을 보니 역시 나는 주인공 어기보다는 어기의 누나 비아에 조금 더 감정을 이입해 있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읽고 영상까지 남겼다는 것을 오늘에사 다시 알아차렸다.
그 뒤로 계속 다른 원서들을 읽어갔다. 기억전달자,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구덩이, 레드먼드의 앤, 별을 헤아리며,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우물 찾는 여정, 가재가 노래하는 곳, 곰브리치 세계사, 13가지 이유, 하울의 움직이는 성, 내 남자친구들에게 시리즈 3권, 아주 작은 습관의 힘, H 마트에서 울다, 레슨인케미스트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안녕 우주까지 읽었고 지금은 파친코를 3개월에 걸쳐서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다. 필사와 생각을 정리하면서 읽은 책들이 그렇게 23권이고 중간중간에 섀도우앤본 시리즈나 듄, 왕좌의 게임, 아르테미스 같은 판타지물이나 로알드 달 단편선 같이 취향을 타는 책들은 혼자서 읽었다.
어떤 책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해서 숨을 죽이며 읽었고 어떤 책은 너무 힘든데 내가 리더니까 정말 있는 힘을 쥐어 짜내면서 겨우겨우 읽었다. 예전에 감동받아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생각보다 별로였던 책도 있었다. 제일 힘들었던 책은 의외로 곰브리치 세계사였다. 다들 쉽게 쓰여져서 세계사 입문으로 추천한다고 했고 나도 한글판을 가지고 있어서 골랐다. 그런데 이 책은 중도 탈락자가 우수수 쏟아졌다. 하도 힘들어서 외국인 친구에게 보여주니 책이 참 쉽고 간결하게 잘 쓰여졌다고 감탄하는 것이 아닌가!! 외국인에게는 쉬운 책인데 왜 우리에겐 어려웠을까. 생각해 보니 용어가 달랐다. 역사책을 영어로 읽어 본 적이 없으니 지명과 인명 등등에 더해서 관련된 말들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는 러시아의 황제는 그냥 캐서린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다가 한참을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그런 역사 속 인물들이고 역사 속 지명들이었다. 수잔 바우어의 책으로 읽어보면 조금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고는 있는데 한 번 데이고 나니 역사 관련 책들은 일단 뒤로 미루어 보기로 했다. 읽을 책은 여전히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서 읽기 슬로우리딩을 진행하면서 두 번, 세 번씩 읽게 되는 책들도 생겼다. 궁금한 마음에 영어독서토론 모임에 가입을 했는데 거기서도 '별을 헤아리며'를 읽었다. 영어책 읽는 밤에서도 진행했으니 세 번을 읽은 셈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름다운 아이'를 두 번째 읽고 있다. 아무리 슬로우 리딩으로 읽는다고 해도 처음 읽을 때는 놓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희석되는 감정이나 기억들도 물론 당연하고. '원더'를 읽으면서 저렇게 펑펑 울고 영상까지 남겼는데 다시 꺼내서 들여다 보기 전에는 원서로서는 쉬운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원서 읽기 초중급 분들이 시작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하나하나 씹으면서 보니까 원더는 정말 보물덩어리였다. 작가가 곳곳에 녹여놓은 다양한 문화적, 문학적, 예술적인 조각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던 것들은 이야기의 진행을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채우는 요소들이었다. 무심한 듯 붙여진 챕터의 제목은 의미심장함을 담은 노래의 제목이었고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책이나 이야기의 제목들은 다 이유가 있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은 알고 나면 서사에 살아 숨 쉬는 듯한 입체감을 부여했다. 거기에 더해진 일상적인 대화들은 생생한 실제 영어회화의 표본이었다. 다시 읽으면서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잘난 척하면서 이 책은 쉽다고 멋대로 판단해 버렸는지 말이다.
나는 영어를 말로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어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말하기와 듣기가 주가 되는 이 구어의 중요성을 놓칠 수 없다. 하지만 글로 영어를 만나는 것은 기본이 되는 언어의 바탕을 넘어서 한 단계 올려주는 과정이다. 우리가 한국어로 된 책과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영어로 된 책과 글을 읽는 과정에서 독특한 그 사유의 작용이 이루어짐을 느낄 수 있다. 같은 내용인데 한국어와 영어가 전달하는 느낌이 몹시 다르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이것은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그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문화를 담고 있는 책을 그 언어로 읽어 보는 것이다. 외국어니까 당연하게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다. 느리게 읽기 때문에 빠르게 넘길 때는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던 부분을 곱씹을 수 있다. 다시 읽으면 처음에는 외국어의 충격과 여파에 당황했던 부분을 이제는 조금은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다. 한국어 책도 당연히 두 번 읽으면 느낌이 다른데 외국어 책도 그러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고 있다가 새삼 깨닫는다. 그러니 '아름다운 아이, Wonder'는 어쩐지 다음에 한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