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책으로 Anne of Green Gables, 빨강머리 앤을 고른 것은 잘한 선택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빨강머리 앤의 인기는 엄청나다. 일본에서는 매년 앤의 팬 한 명을 선정해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보내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릴 때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다양한 번역본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관련된 컬러링 북이나 굿즈는 물론이고 앤에게서 영감을 받은 다른 책들도 많이 출간된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다 보면 문득 영어 원서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소중한 책이기도 해서 선듯 첫 번째 원서 읽기 책으로 골랐는데, 정말 괜찮은가?
우선, 이 책은 무려 백 년도 전인 1908년에 출판된 책이다. 한국어로 먼저 책을 만난 독자들은 그 간극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영어 원서는 그 110년 전의 그 문장과 그 단어들을 딱히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품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면 개화기나 일제강점기 시기의 문학작품을 읽는 셈이다. 만화영화와 소설의 매력에 빠져서 늘 읽고 싶었는데 사 두고 어쩐지 책장이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앞서서 진행했던 그 필사 프로젝트를 운영하신 분은 사실 지혜롭기도 하셨다. 아마 책을 읽으면서 진행했더라면 완주는커녕 줄줄이 다 중도에 탈락했을 것이다.
거기에 지금도 사용하는 같은 단어인데도 의미가 달랐다. ejaculate라는 단어가 하도 많이 나와서 찾아보았다. Marilla ejaculated.라는 문장이 수없이 나오는 것이다. 사전에는 '사정하다'라고 되어 있었다. 마릴라가 앤에게 사정한다고? 이상하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그냥 넘어갈 것을 조금 더 찾아보았다. 분출하다, 폭발하다의 뜻도 있었다. 그러니까 마릴라는 앤에게 애원하는 그 사정을 한 것이 아니라 화를 쏟아낸 것이다. 현대에서는 아무도 ejaculate를 화를 낼 때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떠한 종류의 사정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조금 더 궁금하시다면 사전을 한 번 들여다보시면 될 것 같다.
거기에 몽고메리는 자연을 매우 사랑했다. 아름다운 시골 섬인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빼곡하게 묘사하는데 들어찬 것은 꽃과 나무와 같은 식물의 이름들이다. 유명한 꽃이나 나무 몇 가지 정도는 알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가 아닌 몇 십 가지, 몇 백가지가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문장 구조도 현대의 것과는 조금 미묘하게 다르다. 분명히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이게 문법적으로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다. I shall give life here my best. 나는 현재, 바로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할 거야 라는 의미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솔직히 앤 책 말고는 다른 데서 이 문장을 본 적은 없다. 혹시 몰라서 구글에 I shall give까지만 치니까 바로 이 문장이 나온다. 꿈꾸는 문학소녀답게 수다쟁이 앤 못지않게 장면을 서술하는 몽고메리의 문장들도 만만치 않으니 앤을 읽는 동안 곡소리가 저절로 났다.
그래도 처음 시도하는 책인데, 그래도 빨강머리 앤인데. 이러면서 6명이 끙끙 앓으면서 읽었다. 잘 안 되는 부분은 결국 한글 번역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읽어나갔다. 책은 책을 부른다고 앤 속에는 또 다른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앤과 친구들이 백합공주 놀이를 하다가 죽을 뻔한 장면은 인상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각자 찾아보고 나누었다. 우리는 백합공주로 알고 있지만 원제는 레이디 오브 샬롯. 그러니까 샬롯의 레이디이다. 테니슨이 쓴 시로 엄청나게 긴 시인데 또 그 묘사가 얼마나 굉장한지 나라도 랜슬롯에게 반할 것 같이 써 놓았다. 그렇게 가여운 소녀 일레인에게 동정심도 품어 보면서 또 다른 시들을 찾아보고 나누는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빨강머리 앤을 끝까지 다 읽는 데는 꼬박 10주가 걸렸다. 아마 혼자서라면 한 두 챕터도 제대로 못 끝내고 덮었을 것이다. 그 앤 책은 결혼하기 전에 사 두었으니 최소한 17년은 된 책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앤 책을 펼쳐보다말다를 반복했던 것이다. 함께 나눠주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강제 격리된 기간이 아니었더라면, 첫 책이니만큼 각오를 다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함께 읽어주신 분들이 아니었더라면 빨강머리 앤은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원서읽기로는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적어도 도입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또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하다. 원하는 만큼 의지가 있는 만큼 길은 보이게 되니 말이다.
난이도 극강의 책을 읽고 나니 놀랍게도 상대적으로 다른 책들은 조금 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여하튼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그 해 말에 앤 시리즈의 책을 한 권 또 읽었다. (앤 시리즈는 총 10권으로 되어 있다.) 책은 함께 읽는 사람들이 있어야 더 깊이 있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슬로 리딩으로 완독하고 나니 책을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한 권을 읽고 나면 잠깐씩 쉬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만의 속도로,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일 년에 대여섯 권씩 읽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