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블로그 활동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어느 이웃님의 글에서 영어책 필사 인증을 보았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싱가포르에 사시는 한국분이 정기적으로 운영하시는 필사 프로젝트였다. 일 년에 서너 번 하시는 것 같았는데 곧 새로 모집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아마 다른 책이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빨강머리 앤'이었다. 냉큼 신청하고 기다렸다.
신청자는 매우 많았고 그래서 열대여섯 명 정도로 한 팀이 짜였는데 그렇게 열 팀도 넘었다. 필사는 재미있었다. 매일 저녁 6시였나 7시였나. 하여간 그 정도에 필사할 문장 이미지가 배달이 된다. 평균 한 장 정도의 필사 분량이었다. 필사 후 소감을 자유롭게 적는 부분도 좋았고 다른 분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공유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우선, 나는 책의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진행하고 싶었는데 배달되어 오는 필사 부분은 순서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진행자의 주관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빨강머리 앤 책에서 내가 좀 더 감동을 느끼고 필사하고 싶은 부분은 빠져 있거나 굳이 적고 싶지 않은 부분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모두가 동일한 부분을 하고 각자 느끼는 부분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완주는 했지만 이 필사 프로젝트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진행하시는 분의 수고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하나 필사 이미지 파일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서 팀을 짜고 매일 전달을 하고 잘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행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필사를 하게 된다면 나는 책을 읽고 내가 적고 싶은 부분을 적어야지... 하고 생각만 했다. 그리고는 물론 당연하게도 실행은 하지 않았다.
새로 시작한 하하영 프로젝트 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이건 사실 핑계고 당장 급하지 않으니 그냥 차일피일 미루어 두었던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만약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면 현재 5년째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는 영어책 읽기 및 필사는 훨씬 뒤의 일이 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시작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두에게 힘들었던 그 시간이 내게는 책에 다가가는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학년을 시작할 준비를 하던 그 겨울, 개학 무기한 연기라는 정말 아찔한 소식과 함께 나와 아이들은 집에 갇혀있게 되었다. 아이들 공부를 봐주는 것도, 집안일을 하고 치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학교에 갈 수도 없고 그냥 그렇게 집에만 있는 그 시절,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내게 불현듯 영어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당연하게도 '빨강머리 앤.' 영어 원서 제목은 Anne of Green Gables, 초록지붕의 앤 이다. 지난번에 했던 그 정해진 부분만 하는 필사가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직접 발췌해서 해 보자는 바람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많아진 시간은 그 바람에 불을 지폈고.
하지만 혼자서는 하다가 말게 된다는 것을 나는 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 블로그에 간단하게 글을 올렸더니 여섯 분이나 같이 하시겠다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영어책 필사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