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일본 여행을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일본 언저리만 가 보았을 뿐 일본 본토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일본에 대한 지식은 선입견이 가득할 것이다. 일본 작가의 책도 많이 읽지 못했다. 유일하게 정독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몇 권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일본인의 정서가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도서관에서 뽑아 든 책이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였다. 나이 때문인지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이 노년, 죽음 등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이 책도 제목에 끌려서 뽑아서 보게 되었다.『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제목에서 무엇에 거리를 둔다는 건가 하는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책은 얇고 간결하여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량에 비해 가슴을 때리는 지점이 많아 작가의 깊은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인 소노 아야코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알고 보니 23세 때 「멀리서 온 손님들」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상 후보로 유명하게 된 소설가였으며, 40세에 자신의 노년을 생각하며 쓴 『계로록戒老錄』이라는 책이 노년들을 위한 교과서처럼 알려졌으며 94세가 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현역 소설가였다. 『계로록戒老錄』은 2004년에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로 우리나라에 번역소개되었다.『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2015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2017 올해의 책’, ‘2017년을 여는 베스트북’으로 선정되었다.
책의 내용은 나이 들면서 느끼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짧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 번뜩이는 지혜가 보인다. 그리고 촌철살인의 번뜩임이 있다.
먼저, 책의 제목을 「약간의 거리를 둔다」로 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마법이며 동시에 훌륭한 해결책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121쪽.
우리 모두는 다 성공하고 싶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다. 소노 아야코는 성공적인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은 두 가지 가능성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나는 사는 보람을 발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지점을 인생에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삶의 보람에 대해서 말하자면 자신의 일에서 흥미와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타인으로는 불가능한 나만의 어떤 지점이란 숙련도다. 내가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일에서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완성도를 갖춰놓는 것이 바로 성공적인 인생의 기준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좋아하면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11쪽.
인생을 살면서 얻게 되는 교훈 중 하나는 ‘공짜는 없다’이다. 좀 더 포장하여 말한다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이다. 소노 아야코도 그렇다고 말한다. ‘성공의 유일한 열쇠는 인내’라고.
동화 속 ‘요술봉’ 하나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이 내 손에 들어올 텐데. 그 마법의 봉을 구할 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 요술봉을 대신할 수 있는, 그나마 유사한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딱 하나 있다. 바로 인내다. 인내는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다. 인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은 희망하는 것을 원하는 그 순간에 갖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몸이 아파서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내 몸은 건강한데 가족 중 누가 많이 아파서 열 일을 제쳐두고 간병에 나서야 할 때도 있다. 상황이 이렇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돈은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내는 다르다. 오랫동안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되었다. 돈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을 인내로는 얻을 수 있다. 성공의 유일한 열쇠는 인내인 것이다. 15쪽.
인간의 번뇌는 비교에서 시작된다. 사람마다 다르게 태어나고 가진 것도 다른데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자기를 비하한다. 자기다울 때가 가장 빛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의 가치와 진가를 본인만 모를 때가 많고 쓸데없는 열등감으로 아까운 시간을 놓쳐버리는 때가 많다.
사람은 자기다울 때 존엄하게 빛난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비슷해지려고 시도하는 순간 타고난 광채를 상실한다. 66쪽.
자기답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의 대부분은 선의에서가 아니라 질투일 때가 많다. 인터넷 매체의 발달은 실시간으로 공중에게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전달하고 책임지지 않는다. 소문이 넘쳐나고 그 소문의 대부분은 좋지 않은 내용들이다. 소문은 대개 나쁜 의도를 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문의 밑바닥에는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불행한 가정사나,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내면의 어둠을 소문으로 끄집어내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다는 사악한 욕망의 표출이다. 이 욕망의 뿌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고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비하함으로써 나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것 같은 착각, 다시 말해 자신감을 되찾아 행복해지고 싶다는 조작된 심리에 지나지 않다. 94쪽.
나는 자만심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고 싶은 심리의 밑바닥에는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열등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긴장하는 때가 많다. 높은 사람 앞에서나 대중 앞에서 발표할 때, 특별히 잘하고 싶거나 잘 보이고 싶을 때 긴장한다. 소노 아야코는 긴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장이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칭찬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칭찬받는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칭찬받았다고 해서 나의 실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듯 비방당했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훼손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 날뛰지 않아도 대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힘껏 밟고 서 있기만 해도 편안하다. 처세를 논하는데 자연스러움이 서투름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자연스러움은 정신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98쪽.
고등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는다. 항상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길에서든 버스에서든 교실에서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나를 보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덧붙여서 너희를 좋아하는 멋진 남학생이 어디선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이상스레 잊혀지지 않아서 어디서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사람들로 인해 그다지 깊은 슬픔을 맛보지 않은 까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신의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분만이 나를 알고 계시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 어딘가에서 신이 나를 보고 있다면 나의 행위는 과대평가되지도, 과소평가받을 일도 없다. 내가 달콤한 말로 세상을 속여도 신은 “이 거짓말쟁이가”라고 진실을 분간해 낼 것이다. 101쪽.
소노 아야코는 자식과의 관계도 단칼에 이렇게 정리한다.
자녀는 철저하게 타인이다. 타인 중에 특별히 친한 타인이다. 예를 찾아본다면 교도소를 출소한 그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이다. 자녀가 아닌 다른 누구를 위해 이처럼 정성들여 대접하는 타인이 또 있을까. 122쪽.
소노 아야코는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등불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힘없는 늙은 여인도 타인의 발밑을 밝혀주는 것이 가능하다. 별것 아닌 친절을 통해 그녀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인간의 본질을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행복하다. 안도감은 등불을 발견한 여행자만의 것이 아니다. 140쪽.
소노 아야코는 감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매 순간이 나에게 행운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기준은 감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불행한 사람은 주변 환경이 곤란해진 탓에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나마 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이 누구의 도움 때문인지를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순간, 인간은 불만 덩어리가 되어 불행의 나락에 빠져든다. 감사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영혼의 고귀한 표현이다. 세상 천지에 감사할 만한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이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될 이유를 마련해준 고마운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다. 155쪽.
나는 소노 아야코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해보면 ‘감사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모습이다. ‘감사하는 사람’의 일생에는 향기로운 요소들이 가득하다. 겸손과 너그러움, 따뜻함, 위로, 기쁨과 여유가 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불평하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