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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by 선희 마리아

대체로 책을 선택할 때 나의 기준은 이렇다. 신문이나 다른 책에서 소개되거나 인용된 문장들에 끌려서 원전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이미 검증된 책을 소개받는 것이라 내용에서 살망하거나 실패할 경우가 적다. 다른 하나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는 경우이다. 이때는 주로 책의 제목에 뽑는 경우가 많다. 제목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때이다.


책의 제목에 끌려 읽게 될 때, 두 가지의 경우를 만난다. 하나는 제목을 보면서 기대하였던 만큼이나 그 이상의 내용을 만났을 때이다. 이때의 기쁨과 희열은 대단하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뿌듯함과 그런 책을 만난 것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목에 비해 내용이 실망스러울 때이다. 제목이 내용과 상관이 없거나 내용보다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실망감으로 책을 내려놓게 된다.


오늘 소개하는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무렵, 난 생애 처음으로 가출을 감행했었다. 설날을 일주일 앞두고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에 시어머니인 내가 가출을 한 것이다. 설날 무렵이라 귀성객, 귀향민들로 세상은 들떠있는데 난 집을 떠나 산중으로 숨어버렸다. 아무도 날 찾지 못하거나 찾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명절을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명절 무렵이면 항상 분주하고 조마조마하게 잘 넘겨야지 하면서 불안하고 초조한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평생을 놓지 못할 것 같았던 집안일도 놓아버리니까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었다. 주는 밥을 먹고 명절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에서 혼자만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게 괜히 편치 않았다.


설날 전날, 시골의 명절 전야는 어떤가 하고 읍내를 나가 보았다. 그런데 시골 읍내의 설날 전야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미 장보기는 끝나고 귀성객들도 모두 귀향하여 가족들이 함께 하하 호호하면서 음식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썰렁한 읍내를 돌다가 불이 켜져 있는 서점으로 들어갔다. 나이 든 할머니가 어울리지 않는 시간에 시골 서점의 서가를 둘러보다가 심란한 마음으로 뽑아 든 책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였다. 가벼운 내용이 아닌 것 같은 약간의 지적인 허영심으로 몇 권의 책과 함께 들고 나왔다. 순전히 복잡한 내 처지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책 제목 때문에 들고 나온 책이었다. 그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다만,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그때의 일들이 생각나고, 아, 그렇게 만났던 책이었구나 하는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이 책의 저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소설가이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처음 저자의 이름을 보면서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라는 이름을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반가움과 생경함을 동시에 느꼈다. 프랑스인이나 프랑스 문학에 대해 그만큼 무지했다는 고백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에 대한 내용을 올린다.


나는 번역된 책을 읽을 때, 책의 원제가 무엇이었을까에 관심을 갖는다. 어떤 때는 번역된 제목이 원제목보다 더 좋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원제목이나 내용과 너무 동떨어지거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 지나치게 농후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인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때문에 집어든 책이었지만 저자가 쓴 실제의 제목과 얼마나 근접한 제목인가가 궁금하였다. 또,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이 책을 70세가 넘어서 쓴 것 같은데 70세가 넘은 노작가가 어떤 제목으로 글을 써내려 갔는지가 궁금하였다.

이 책의 원제목은 『Une brève éternite –philosophie de la longévite-』이다. 프랑스어를 절대 모르는 필자가 짐작한 바로는 『짧은 영원- 장수의 철학』이나 『영원에 대한 짧은 단상-장수의 철학』 쯤으로 이해되는데, 번역된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라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천착하였느냐 하면, 책을 읽어가면서 이 제목이 책의 내용과 부합하는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기 때문이다. 재발간된 책에서 브뤼크네르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이렇게 싣고 있다.

친애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제 책이 한국에서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책은 '나이 듦의 기술', 즉 나이와 생물학의 강요에 굴하지 않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그 기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 포기를 포기하라! “

책의 내용에 대해서 공감하는 바가 많지는 않았다. 다만 저자가 대단한 석학이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구나 하는 것과 책의 내용이 어렵고 낯설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브뤼크네르가 누구나 알지만 피하면서 말하지 않는 진실을 너무도 솔직하고 가감 없이 드러내 버린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너무 적나라해서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생소하고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위해서 차례를 소개한다.

차례

프롤로그 - 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포기 - 포기를 포기하라

자리 -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

루틴 -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시간 -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욕망 - 아직도 이러고 삽니다

사랑 -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기회 - 죄송해요, 늦으셨습니다

한계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죽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 - 불멸의 필멸자들

에필로그 -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브뤼크네르는 현시대의 가장 큰 문제인 인간 수명의 연장에 대해서 이렇게 일갈한다. 현대 의학과 과학 기술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년을 연장시켰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고 맞는 말인가.

결국, 까놓고 보면 사기다. 과학 기술이 늘려 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쌩쌩한 30대, 40대의 외모와 건강 상태로 살게 해준다면, 혹은 우리가 선택한 연령대로 살아가게 해준다면, 그게 진짜 기적일 것이다. ‘수명 연장 기술’이 세포 및 미토콘드리아 관련 요법, 수술, 연구를 통해 그러한 방향에 매진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먼 얘기다. 30쪽.

그리고 원하지 않게 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렇게 대변한다.

빅토르 위고는 좀 더 간단하게,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정말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주어진 이 20년, 30년으로 뭘 해야 하나? 우리는 이미 제대했는데도 또다시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과 비슷한 신세다. 할 일은 얼추 다 했고 결산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계속 하기는 해야 한다. 삶이 두렵고 이 길의 끝에 모든 짐을 내려 놓고 쉴 수 있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늙는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인디언 서머,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이 새로운 만년晩年은 그들의 소망을 부정한다. 그들은 쉬기를 원했는데 버티라고 한다. 24쪽.

그러면서도 브뤼크나르는 원하는 노년은 아니지만 주어진 노년도 근사하다고 하면서 “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고 하면서 “말년은 평온해야겠지만 체념하고 살 필요는 없다.”고 용기를 북돋운다.


브뤼크네르는 노년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노년은 으레 노망과 저주라는 이중의 함정에 빠진다. 트집쟁이, 투덜이, 꼰대가 우리 안에서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당장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런 병을 ”영혼의 주름“이라고 불렀다. ”늙어가면서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은 없으며, 있다 해도 몹시 드물다. “ 95쪽.

그러면서 멋진 노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노망 나고 정신 나간 노인도 많지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고령에도 통찰력과 푸릇푸릇한 정신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노인, 분별력의 대가들도 있다. 123쪽.
일반적인 붕괴의 법칙에는 예외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유독 일찍 시들어 30세면 벌써 얼굴이 달라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우아해지고 관록에서 풍기는 멋까지 더해진다. 나이가 그들을 아름답게 해주진 않았지만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멋있고 잘생긴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시간의 귀족이다. 204쪽.

브뤼크네르의 글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허풍선이와 징징이”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부류가 있다. 바로 “허풍선이와 징징이”이다. 허풍선이는 항상 자기는 건강하고 세월의 무게나 인생의 문제를 전혀 못 느낀다고 허세를 부리며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서 오래 끌지도 않고 세상을 떠난다. 징징이는 항상 골골대면서 바로 세상을 떠날 것처럼 온갖 걱정을 다하고 매일 병원을 오가면서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호소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다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더는 자신의 건강 문제를 토로할 친구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왔는가를 돌아보았다. 허풍선이로 살아왔는가, 징징이로 살아왔는가. 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허풍선이로 살아갈 것인가. 징징이로 살아갈 것인가.


브뤼크네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조언을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퇴장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윤리적이거나 의학적인 결정을 가급적 모두 마무리해야 한다. 생물학적 생존에는 궁극적 가치가 없다. 자유와 존엄이 더 중요하다. 자율성,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능력이 사라지면 먹고 자고 숨 쉬는 것이 고문처럼 괴롭다. 그러면 사라질 때가 된 거다. 할 수 있는 한 우아하게, 세상과 작별할 때다. 201쪽.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는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당신의 장례식에서 제일 서럽게 울지만 가장 먼저 당신을 기억에서 지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두고두고 당신을 그리워할 것이다. 263쪽.

노년과 죽음에 대해 거침없이 설파하던 브뤼크네르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304쪽.

이제, 부정할 수 없는 노년의 길에 접어들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교훈과 방법을 제시받았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덮는다. 브뤼크네르가 설파한 노년에 대한 정의와 접근이 나의 것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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