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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

by 선희 마리아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그 유명한 헤르만 헤세. 제목만으로도 가슴을 시리게 했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의 작가. 그 헤세가 자신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자서전 식으로 서술한 소설이 29세 때인 1906년에 발표한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헤세의 아름다운 문장과 낭만적 분위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란 평을 받았던 헤세의 기가 막힌 문장과 분위기 묘사는 과연 헤세로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었다.

헤세에 대해서는 『수레바퀴 아래서』 뒷부분에 연보가 자세히 나와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헤세의 자서전적인 성장소설, 자전소설이다.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얼마나 헤세와 닮아 있는지는 번역자의 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1906년에 출간된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 자체로 헤세의 자서전 가운데 일부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청소년 시절의 체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헤세의 약력 중 『수레바퀴 아래서』와 관련된 부분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헤세는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주의 소도시 칼프의 유서 깊은 신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헤세는 목사의 길을 걷기 위해 열세 살 되던 해에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어렵기로 유명한 주(州)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로 시인을 꿈꾸게 되면서. 즉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때문에 규율과 인습에 얽매인 신학교 생활을 이겨 내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 이후 자살 기도, 정신 요양원 입원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김나지움에 입학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1893년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2년간 시계 부품 공장의 수습생 생활을 거쳐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게 된 20대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243쪽.

해설에서 볼 수 있었던 대로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슈바르츠발트라는 작은 마을에 신비로운 불꽃처럼 나타난 아이였다.

한스 기벤라트는 확실히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섞여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외모도 훌륭하고 남달랐다. 슈바르츠발트의 이 작은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인재가 배출된 적이 없었다. 이 좁은 지역을 벗어나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칠 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진지한 눈과 총명함이 도드라지는 이마, 기품있는 걸음걸이는 어디에서 물려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9쪽.

한스의 탁월한 재능은 미래를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학교,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게 하였다.

그것으로 그의 미래는 벌써 확실히 정해졌다. 부모가 부유하지 않는 한, 슈바벤 지방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소년에게 단 하나의 좁은 길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주(州) 시험에 합격해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 이어서 튀빙겐 신학 대학에 진학해 교수나 목사가 되는 길이었다. 10쪽.

고향의 명예를 한 몸에 걸머지고 힘겹게 공부한 한스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치러진 주(州)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한다.

시토회의 마울브론 수도원은 주(州)의 북서쪽, 나무가 울창한 언덕들과 작고 조용한 호수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도원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들은 넓고 튼튼하며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건물의 안과 밖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한 데다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변의 아름답고 푸른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75쪽.

한스는 아홉 명의 개성 있는 헬라스 방 친구들과 함께 신학교 생활을 시작한다. 한스는 성실하고 착하며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친구들의 존경과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았다. 한스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스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하일너에게 끌렸다.


하일너는 별나고 특별한 아이로서 별로 공부는 하지 않지만 아는 것이 많아 질문을 받으면 척척 대답하는 아이였다. 또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경멸했다.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의 우정은 학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시인과 공부벌레, 경박한 소년과 진중한 소년, 둘 다 천재라고 불렸지만 한스는 모범생이라는 의미로, 하일너는 조롱의 의미로 불렸다.

두 소년의 우정은 기묘했다. 하일너에게 한스와의 우정은 오락이자 사치였고 편안하게 변덕을 부릴 수 있는 관계였다. 반면 한스에게 하일너와의 우정은 때로는 자랑스러운 보물이었고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 하일너와 어울리기 전까지 한스는 저녁 시간을 공부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매일 공부에 싫증난 하일너가 한스에게 다가와 책을 빼앗고 같이 놀기를 원했다. 한스는 하일너를 몹시 좋아하면서도, 나중에는 매일 저녁마다 혹시 친구가 다가올까 봐 겁을 내곤 했다.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한스는 자습 시간에 배로 열심히 공부했다. 하일너가 그런 한스의 노력을 비웃기 시작한 건 더 큰 괴로움이었다. 106쪽.

1월의 어느 날, 같은 방에 있는 힌딩거라는 친구의 익사 사고가 있었다. 힌딩거가 얼음이 살짝 얼어있는 연못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이후 한스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스는 친구와의 우정이 깊어지고 행복해질수록 학교와 조금씩 멀어졌다.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었던 기벤라트가 반항아 하일너의 영향을 받아 문제아로 변하자 교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청년기로 접어드는 위험한 시기에 조숙한 소년이 보여주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129쪽)

교장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하일너는 퇴학 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난다. 한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친구가 갑자기 한스의 인생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스에게 연민을 느끼는 복습 지도 교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여윈 얼굴에 나타난 한스의 절망적 미소 뒤에 수렁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죽어 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든 원흉은 바로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그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위태롭던 소년 시절에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들은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 친구들로부터 그를 멀리 떼어놓고, 왜 낚시와 자유로운 산책도 못 하게 했을까? 왜 하찮고 소모적인 공명심을 부추겨 그로 하여금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품게 만들었을까? 왜 그들은 시험이 끝난 뒤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방학조차 푹 쉬지 못하게 했을까? 지나치게 혹사당한 작은 말은 길에서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156쪽.

한스는 학교 생활을 마치지 못하고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집으로 보내진다. 교장은 한스가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한스 자신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학교와 학문과 창창한 미래는 모두 끝났다. 그런데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게 실망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그는 잠도 실컷 자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꿈도 꾸면서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괴롭힘이라면 진저리가 날 만큼 당했으니 이젠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랐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런 휴식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고향이 가까워지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래서 기차가 예전에 그가 신나게 뛰어놀던 언덕과 숲이 보이는 지역을 통과하는데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러다 하마터면 고향 역에서 못 내리고 지나칠 뻔 했다. 159쪽.

한스의 아버지는 아들 한스가 의사와 교장이 언급한 것처럼 신경병에 걸렸을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시달린다. 한스는 아버지가 기분 나쁜 호기심으로 탐색하거나 억지로 자상하게 대하는 것을 눈치채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한스는 화창한 날씨일 때는 몇 시간씩 숲속에 누워있곤 했는데 그럴 때는 행복했던 소년 시절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올라 상처입은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것을 느꼈다.


한스의 병은 도둑맞은 유년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따뜻했던 시기로 도망치고자 했던 것이다.

조숙한 소년은 병이 든 지금에야 비현실적인 두 번째 유년기를 겪고 있었다. 유년기를 도둑 맞은 그의 마음은 막혔던 둑이 터지듯 밀려오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도망친 것이다. 그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추억의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추억이 강렬하고 뚜렷하다는 것은 어쩌면 병증일 수도 있었다. 그는 예전에 실제로 그 일을 겪을 때와 거의 똑같은 온기와 열정으로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의 내면에서 기만당하고 억압당했던 어린 시절이 마치 오랫동안 막아놓았던 봇물이 터지듯 용솟음쳐 올랐다. ( 169쪽.)

가을이 되자 아버지는 한스의 미래를 위해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한다.

밥을 다 먹은 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아버지가 평소처럼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한스, 너는 기계공이 되고 싶니, 서기가 되고 싶니?」 「뭐라고요?」 한스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너한테 선택지가 두 개 있다. 다음 주말에 기계공 슐러 씨의 수습공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다음 주에 시청에 서기 수습생으로 들어가는 것. 어느 쪽이 좋을지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이 문제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196쪽.

아버지의 말에 따라 기계공의 수습생이 된 한스는 일요일, 친구인 아우구스트와 다른 숙련공들과 함께 빌라흐에 가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어울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스는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풀밭에 엎드려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신음하며 흐느낀다.


다음 , 저녁 내내 불쾌한 마음으로 한스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다.

한스는 다음날 한낮이 되어서야 사람들한테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는 회초리를 치우고 쌓였던 분노도 내려놓았다. 그는 눈물도 보이지 않았고 별다른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따금 문틈으로 조용히 누워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한스는 여전히 반듯한 이마와 영리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로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나는 뭔가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어요. 하고 말하는 듯 했다. 이마와 손에 푸르스름하고 붉게 긁힌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곱게 잠들어 있었다. 하얀 눈꺼풀이 두 눈을 덮고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은 흐뭇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는 한창 아름답게 꽃필 시기에 느닷없이 툭 꺾이는 바람에 즐거운 인생길에서 이탈한 꽃봉오리처럼 보였다. 한스의 아버지는 피로와 외로운 슬픔에 젖은 나머지 이런 행복한 착각에 빠졌다. 239쪽.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마을 위로 푸른 청명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골짜기에는 강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전나무가 우거진 푸른 산들이 그리움을 안고 멀리까지 아스라이 뻗어 있었다. 플라이크 씨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기벤라트 씨의 팔을 붙잡았다. 시간의 정적과 고통스러운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한스의 아버지는 그제야 상념을 떨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익숙한 삶의 터전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241쪽.

1906년에 나온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답을 번역자의 말로 찾아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06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 소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 한스가 겪는 일이 우리 청소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는 좋아하는 취미 생활도 포기하고 건강도 해쳐 가면서 오로지 성적 위주의 치열한 입시 경쟁에만 몰두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헤세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얼까 생각해 본다. 과거의 추억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애가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야 할 것이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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