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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희랍어 시간』

by 선희 마리아 Feb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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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한강의 작품을 모두 사들여 읽어가는 친구가 있다. 한강의 책 읽기가 아직 진행 중인 친구는 지금까지 읽은 한강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다고 생각되는 것이 『희랍어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겨 『희랍어 시간』을 챙겨서 읽어 보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희랍어 시간』은 2011년 가을에 발표된 한강의 장편소설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10월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면서 선정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도 한강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강 소설의 특장을 ‘범상치 않은 소재의 발굴,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문장, 아름답고 모호한 분위기’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읽은 『희랍어 시간』 역시 한강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소설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여자와 남자이다.


여자는 수년 전에 이혼을 했고,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세 차례의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어 아이를 전 남편의 집으로 들여보낸 지 오 개월이 되어가는 형편에 있다.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10쪽.             

남자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의 해외 지사 파견으로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이민을 갔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남자는 기초 독일어 교본과 회화 테이프를 사러 갔다가『숫타니파타』, 『법구경』, 『화엄경 강의』, 『열반경 강의』등을 사서 독일로 떠난다. 독일에서 보낸 십칠 년 동안 그는 그 책들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고, 어떤 날은 한글의 생김새를 들여다보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지 않고 오랫동안 들여다보고는 했다.

강단에 선 남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체구는 약간 작은 편이고 눈썹과 인중의 선이 뚜렷하다. 감정을 자제하는 엷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다. 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 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 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10쪽.      

여자는 네 살에 한글을 깨치고 여섯 살에 한글의 구조, 자음과 모음의 결합에 따라 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아 알 정도로 언어에 관해 빠르고 영민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친구 삼아 지내던 그녀에게 언어는 가장 가깝게 다가왔고 꿈에서도 언어들이 돌아다니는 꿈을 꾼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 그녀는 자신에게서 언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은 그녀가 막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발음을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 침묵에 싸여 더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더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15쪽.        

놀라서 달려간 병원의 정신과 치료효과가 없던 그녀의 막힌 언어는 뜻밖에도 생소하고 낯선 불어 단어 하나로 터지기 시작했다.  

한문이나 영어가 아니라 하필 불어였던 것은, 고등학교 과정부터 선택해서 배우는 낯선 외국어라서였는지도 몰랐다. 여느 때처럼 묵묵히 흑판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단신短身에 머리가 반쯤 벗어진 불어선생이 그 단어를 가리키며 발음했다. 그녀의 방심한 두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달싹이려 했다. 비블리오떼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17쪽.

 열일곱 살 때부터 남자는 시력을 잃어간다. 독일인 의사는 섣부른 수술은 오히려 실명을 앞당길 뿐이라고 설명하며 최대한 실명을 지연시키는 치료를 한다. 그렇지만 사십 세 무렵이 되면 완전 실명에 이를 것이라고 진단한다. 남자는 십칠 년의 세월이 흐른 서른한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와 사설 아카데미에서 희랍어 강의를 하며 살아간다. 홀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걱정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이 년만 시험 삼아 고국에서 살아보겠다고 안심시킨 뒤 돌아온 남자는 처음에 작정한 시간의 세 배 가까이를 홀로 살아가고 있다. 

         

여자와 남자는 희랍어 강의 아카데미에서 수강생과 강사로 만난다. 많지 않은 수강생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희랍어 강의를 듣는데, 여자는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다른 학생들과 대화도 하지 않고 강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여자가 말이 없거나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강사는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는 목적이 궁금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처음 언어를 잃은 지 이십 년 만에 또다시 침묵이 여자를 에워쌌다.      

지난해 늦봄, 저렇게 백묵 가루가 잔뜩 묻은 손으로 여자는 흑판을 짚고 서 있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여자가 끝내 다음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 채 일 분여의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학생들도, 천장도, 창밖도 아닌 정면의 허공을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곱슬머리에 귀염성 있는 눈매의 여학생이 물었다. 여자는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잠시 경련했을 뿐이었다.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것이 다시 왔어.
마흔 명 남짓한 학생들은 서로의 눈을 보았고,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속삭이는 질문들이 책상에서 책상으로 번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침착하게 그곳을 걸어나가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복도로 나온 순간, 은밀하던 속삭임들은 갑자기 음량을 키운 스피커처럼 소란해졌고, 석조 복도에 울리는 그녀의 구두 소리를 삼켜버렸다. 11쪽.           

여자는 이십 년 전에 낯선 외국어가 자신의 언어를 틔워 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언어가 처음 언어인 것처럼 자신의 말을 되찾아 줄 것을 기대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언어인 희랍어 강의를 듣는 것이다.    

이십 년 전,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리리라고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함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원서로 읽기를 원하는 플라톤과 호메로스와 헤로도투스, 속화된 헬라어로 쓰인 후대의 문헌들에 그녀는 거의 무관심하다. 더 낯선 문자를 쓰는 버마어나 산스크리트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면 주저없이 그것들을 들었을 것이다.  19쪽.  

 남자는 혼자 있을 때면 독일을 생각한다. 독일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첫사랑이었던 여자, 죽었다는 부고를 들은 유일한 독일인 친구를 생각하며 이방인이었던 독일에서의 삶을 회상하고 혼자 돌아온 고국에서 또 다른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생각한다.

      

남자는 독일에서 정기적으로 다니던 병원의 뒤쪽 창고에서 갓난아기 때 열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병원장의 딸이 목가구를 제작하며 지내는 것을 보게 되고 그녀와 가까워지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은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결국 나는 눈이 멀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당신을 볼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필담으로도, 수화로도 당신과 말을 나눌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46쪽.

그렇지만 그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열일곱 살의 남자가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목공예 작업을 하며 살아가는 청력을 잃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여자는 지금까지 나누던 애정을 팽개치고 남자를 단호하게 내쫓는다. 몇 주 후에 찾아와 사과하는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그 얼굴을 다시 나무토막을 집어 들고 후려갈기던 여자를 남자는 잊지 못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순간의 어떤 것도 내 기억 속에선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뿐 아니라, 당신과의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까지 낱낱이 살아 꿈틀거립니다. 나의 자책, 나의 후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눈물에 온통 젖어 번들거렸던 그 얼굴. 내 얼굴을 후려친, 수년간 억센 나무를 다뤄 사내보다 단단했던 주먹.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37쪽.        

아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여자와 아이는 인디언식 이름을 짓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 반짝이는 숲‘이라고 짓고, 엄마의 이름을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라고 지어 주었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골격이 섬세한 아이였다. 무서운 장면이 있는 책을 읽으면 38도 가까이 열이 올랐고, 긴장하면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그 아이가 친가의 장손이자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 예전만큼 아주 어리지는 않기 때문에,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무 예민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전남편이 일관되게 주장해왔기 때문에 – 십대에 받은 정신과 진료기록이 불리한 자료로 제시되었다.-지난 해 은행 본사로 승진 발령받은 그에 비해 그녀의 수입이 턱없이 적고 불규칙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막 재판에서 패했다. 이제 그나마의 수입원도 사라졌으니, 현재로서 다음 소송이란 불가능했다.  22쪽.       

 어느 날, 사라져 가는 시력 때문에 해가 있을 때 아카데미에 나오던 남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난간을 바라보며 서 있는 여자를 본다. 여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도와줄 마음으로 다가간 남자를 보자 여자는 강의실로 올라가 버린다. 계단 난간 아래를 살피던 남자는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에 놀라 발을 헛디디고 안경을 놓쳐 버리고 어둠 속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남자에게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부축한다. 남자는 희끄무레한 윤곽과 함께 다시 빛으로 나오고 병원을 거쳐 집으로 간다.      

그녀는 신장 옆에 두었던 그의 가방을 들어서 옮기려다 도로 내려놓는다. 밤까지 가시지 않은 습한 무더위 때문에 그녀의 검은 블라우스는 축축하다. 묶었다가 풀어 어깨까지 헝클어져 내려온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있다. 그의 흰 셔츠도 등 부분이 완전히 젖었다. 가슴 앞쪽으로 드문드문 튄 핏자국은 이제 거무스름하게 말랐다. 붕대를 처맨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두 사람의 팔과 얼굴 모두 땀에 젖어 미끈거린다. 139쪽.     

언어를 잃어버린 여자와 희미한 윤곽 밖에 보지 못하는 남자는 한 공간에서 밤을 보내고 남자는 듣지 못하는 여자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미안해요.
이렇게 혼자 오래 말해본 건 처음입니다. 169쪽.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놓인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느껴지는가. 한강의 정서가.

아름다움이, 슬픔이, 아련함이, 쓸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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