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후반,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프랑수와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라는 작품을 읽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프랑수와즈 사강(1935-2004)은 본명이 프랑수아즈 쿠아레 Francoise Quoirez이지만 아버지가 가족의 성을 쓰는 것을 반대하여 프랑수와즈 사강으로 필명을 삼았다.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사강은 19세인 1954년에 장편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데뷔하여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으며 이 작품으로 그 해의 프랑스 문학 비평상을 받았다. 그 뒤 『어떤 미소』, 『한 달 후, 일 년 후』,『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신기한 구름』, 『뜨거운 연애』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세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전 프랑스를 휩쓴 사강은 감각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의 작품들과 기행적 일상으로 ’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고 불리면서 타고난 천재성을 다스리지 못하였다.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고 재즈를 즐기며 약물중독에 빠지고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어울려 다니는 등 혜성과 같이 나타난 유명 소설가이면서 사회적 지탄을 한 몸에 받았다. 사강은 공공의 적이 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나는 한 번도 내 작품들을 통해 평가받지 못했어요. 사강이라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죠. 시간이 흐르자 작품을 통해 평가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것에 익숙해졌죠.” 188쪽.
예리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고독과 야망, 이기심 등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사강의 작품은 사람들을 놀라고 부끄럽게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자유로운 감성과 섬세한 심리묘사, 담대하고 솔직한 표현은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켜 사강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였다. 연극이나 영화, 혹은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강의 이름과 소설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고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사강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한 달 후, 일 년 후』는 제목을 프랑스의 비극작가 라신의 희곡 「베레니스」에서 가져 왔다.로마 황제 티투스와 유대 여왕 베레니스의 이별 장면에 “한 달 후에 일 년 후에 어떻게 견디오리까? 수많은 바다가 당신에게 나를 떼어놓고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보지 못하는데, 날이 또 새고 날이 또 지는 것을” 하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이 대사는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애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지만, 사강은 반대로 이 구절을, 한 때는 사랑했지만 세월이 흐르면 변하고 잊히게 마련인 남녀 간의 사랑과 덧없음을 아련하게, 조금은 냉소적으로 사용하였다. (197쪽)
『한 달 후, 일 년 후』는 이십 대의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 조제와 조제와 동거 중인 연하의 의대생 자크, 조제와 사귀었다가 니콜과 결혼하고 여전히 조제를 사랑하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나르만을 애타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니콜, 배우로 성공하기를 열망하는 무명배우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출판 편집자 알랭, 그의 부인 파니, 알랭의 조카로 베아트리스를 사랑하게 되는 젊고 순수한 청년 에두아르, 영향력 있는 연극 연출가로 베아트리스에게 접근하는 졸리오 등 아홉 남녀의 각기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강은 『한 달 후, 일 년 후』라는 제목을 통해 서로 어긋나는 관계와 욕망을 통해 사랑의 덧없음과 허무한 인간관계를 그려내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밤새 파리의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던 소설가 지망생인 베르나르는 새벽 네 시가 가까운 시간에 결국 조제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전화 신호음이 울리자 잠자고 있었던 듯한 청년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리고 이어서 “누구야? 하는 조제의 목소리. 10쪽.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게 전부였다. 무엇으로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까? 24쪽.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고, 주름이 세 개 있으며, 자크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125쪽.
베르나르는 한때 베아트리스와도 연인관계였다. 베아트리스는 베르나르를 잊지 못하지만 베르나르는 조제에게 홀려 있다. 그의 모든 관심과 눈길을 언제나 조제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조제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 베르나르는 니콜이라는 아가씨와 잠시 사귀다가 결혼을 한다. 니콜은 소설을 쓰고 지적인 베르나르를 열렬히 사모하며 그의 모든 것을 추종한다. 그녀는 잠을 잘 때도 베르나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고 하루의 모든 시간을 베르나르를 기다리는데 쓴다. 베르나르는 이런 니콜을 측은하게 생각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여자가 그의 아내라는 것을, 그의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오직 그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만 생각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이것이 지금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잃을 뻔했다. 베르나르는 니콜이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과 그들 자신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혔다. 너무나 비통한 감정이라서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135쪽.
매주 월요일마다 자신들의 집에 작은 살롱을 열어 사람들과 초대하는 알랭 말리그라스와 부인 파니는 아름다운 부부다. 출판편집자이자 점잖은 중년 신사인 알랭과 파니는 1940년 해방 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그리고 사 년 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오십 대가 되어 많이 변하고 주름진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친절하고 정다운 부부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배우 베아트리스는 베르나르와 전쟁 직후에 꽤 격정적인 관계를 가졌던 사이였다.
한 달 후, 일 년 후, 우리는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될까요?
주인님, 드넓은 바다가 저를 당신에게서 갈라놓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베레니스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 얼마나 많은 날이 다시 시작되고 끝났는지요. 20쪽.
베아트리스는 배우로서 성공하기를 기다리며 오 년째 「베레니스」를 암송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마다 월요 살롱에 참석하는 베아트리스를 알랭은 사랑하고 있다.
알랭 말리그라스는 허둥지둥 베아트리스를 맞으러 달려 나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베르나르도 왔나요? “ 베아트리스가 물었다. 33쪽.
알랭은 도둑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호텔에서 베아트리스와 함께 세 시간을 보냈고, 행복감이 부여하는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당당하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터였다. 그는 파니를 배반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돌아왔다. 파니는 파란색 평상복을 어깨에 걸친 채 자기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알랭은 사업상의 저녁 식사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욕실에서 옷을 벗었다. 그는 기진맥진한 것을 느꼈다. 66쪽.
베아트리스는 시골에서 알랭의 집에 온 알랭의 젊은 조카 에두아르 말리그라스의 순결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격렬한 욕망을 느낀다. 에두아르는 베아트리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두 사람은 격렬한 육체적 관계에 탐닉한다.
에두아르 말리그라스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행복 혹은 불행을 위해 태어난, 그리고 냉담함에 숨 막혀하는 젊은이였다. 따라서 그는 베아트리스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했다. 78쪽.
그렇지만 베아트리스는 에두아르에게 싫증을 느끼고 영향력 있는 앙드레 졸리오에게 다가간다.
명성이란 한 번에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퍼져나간다. 어느 날 그녀는 저명하다고 인정받는 한 연극 관계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앙드레 졸리오에게서 역할 하나를 제안받은 것이다. 그는 연극 연출가이자 요리 관련 저술가이며 그 밖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10월에 상연할 자신의 다음 작품에서 꽤 큰 배역 하나를 맡아달라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게다가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자며 미디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그녀를 초대까지 했다. 86쪽.
앙드레 졸리오는 베아트리스를 자신의 정부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한편으로는 재능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망의 잔인한 어둠을 알아보았고, 그 두 가지가 흥미를 끌었다. 104쪽.
까닭을 알 수 없는 베아트리스의 무관심과 변심에 괴로워하던 에두아르는 어느 날 알랭의 집에서 파니의 위로를 받고 따뜻한 정을 느낀다.
한 시간 뒤 에두아르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여자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잠에서 깬 뒤 그가 한 최초의 행동은 남자의 행동이었고, 파니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행동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에두아르는 새벽에 눈을 떴다. 그는 낯선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눈과 같은 높이에, 침대 시트 위에 반지 몇 개가 끼워진 여자의 늙은 손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고,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그곳을 떠났다. 파니는 자는 척하고 있었다. 153쪽.
오랜만에 다시 열린 알랭의 월요 살롱에서 베르나르는 조제와 조우한다.
그녀는 거실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크를 바라보았다. 베르나르가 그녀의 시선을 뒤쫓았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조제가 말했다. 186쪽.
지독한 허무와 외로움이 소설 가득하다. 아마 사강 자신의 외로움과 허무가 아니었을까.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추종하고 자기와 어울리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이 극히 찰나적이고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함께 어울리면서도 사강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과 더욱 격렬하게 시간을 보낼수록 사강의 외로움과 허무함은 커져 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