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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이 열린다』

by 선희 마리아

난, 종이신문 애독자이다. 새벽에 현관문을 열고 던져져 있는 종이 신문을 집어 들 때 풍기는 활자 냄새가 참 좋다. 인쇄 기름 냄새일 것 같은 활자 냄새를 맡으면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고 새로운 호기심과 생기가 돈다. 난 신문을 정독하는 편이다. 신문을 정보 습득의 일차 자료로 활용하는데 특히 신문의 문화면을 주의 깊게 보면서 신간 도서라든지 추천 도서 코너 등을 통하여 읽어야 할 책들을 찾아낸다.


여기에 소개하는 책도 신문을 통해서 소개받은 책이다. 어느 날 신문의 「아침의 문장」이라는 코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나의 희망은 거창하지 않다. (중략)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나의 변화뿐이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내 모습. 그 모습을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하루. 그날이 오늘임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일의 전부였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이자 일흔 넘어 번역을 시작해 200여 권 넘는 책을 펴낸 김욱의 산문집 『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은 열린다』에서.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4.11.5(화). 28면.

이 문장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글보다는 작가에 대한 소개였다. 아흔이 다 된 작가가 자기 이름으로 낸 첫 번째 책이라는 것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올해 나는 일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나이, 만 나이, 정부에서 새롭게 제정한 나이 등을 핑계 삼아 어쩌든지 내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려고 했다. 약 3년을 그렇게 버텼는데 올해 들어서는 내가 일흔이 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일흔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슬슬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은퇴 후 마치 그동안 일 때문에 못했던 것처럼 나는 하고 싶었던 일에 몰두하였다. 독서와 글쓰기에 온종일 매달리다시피 하는 날들을 보냈다. 은퇴 전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나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일이었던 까닭인지 별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강요받지 않은 자발적 독서와 글쓰기라는 새로운 재미 덕분에 은퇴 후의 2-3년을 전혀 무료하지 않게 보냈다. 하루하루가 충만하고 괜찮은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새해가 들고 칠십이라는 나이를 부정할 수 없게 되면서 그동안 충만했던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 것인가 하는 회의도 몰려왔고 나 혼자만의 이런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무력감도 들었다. 목표 없고 방향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이제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 때, 위의 글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하여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나이가 팔십팔 세. 그렇지만 작가는 글을 처음 쓰는 사람은 아니었고 평생을 번역으로 살아왔던 전문 번역가였다. 스무 살 피 끓는 나이에 작가는 소설가를 꿈꾸면서 국문학과에 진학하였다. 학업 중에 전쟁을 겪고 난 뒤 작가는 소설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생활을 위한 번역가가 되었다. 생계를 위했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남이 써놓은 소설을 번역하는 번역가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칠십까지 전문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꿈대신 현실을 택하였던 작가는 은퇴를 하면서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삶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누구의 삶이든 어느 위인보다 거창하고, 그 어느 유명인만큼이나 잠재력을 타고났다. 꿈을 잃고 살아온 나는 모든 것을 상실한 일흔 살이 되어서야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내 손으로 쌓아 올린 재산과 명예와 사회인으로서의 자격마저 상실했을 때, 그런 내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꿈, 그것 하나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스무 살 시절로부터 반백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였다. 21쪽.

그러면서 작가는 이십 대 때 소설가의 꿈을 버린 것이 결국은 비겁함 때문이었음을 처절하게 인정한다.

일흔 살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스무 살의 내가 하지 못했을 리 없다. 단지 나는 비겁했을 뿐이다. 스무 살에 이루지 못한 꿈을 서른에, 마흔에, 쉰에, 예순에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아파하며 삶의 끝자락에서 떠나버린 꿈이라도 되돌려 볼까, 앙상한 고목 나뭇가지 같은 팔꿈치를 휘두르며 아직 내 손이 닿지 않은 흰 종이 한 장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22쪽.

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처절하게 나를 반성하고 돌아보았다. 그 많던 가 능성을 쉽게 내동댕이치고 편안함을 택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이제 또 칠십 대가 되었으니까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나를 돌아보았다. 작가의 후회처럼 세월이 흐른 뒤 결국은 모든 것이 나의 비겁함 때문이었다는 후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또 지금 내 삶을 충족시키고 있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그만둔다면 무엇으로 날마다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무료하게 빈둥거리면서 살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책을 읽을수록 회한에 젖고 후회에 젖은 작가의 글은 공감되었다. 특히 늦은 결혼으로 늦게 얻은 외아들에게 자신과 같이 가난을 대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전 재산을 털어 넣은 투자가 실패하여 아들을 대학에도 가지 못하는 가난으로 몰아넣은 자기를 처절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가난만을 물려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설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는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 주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험난한 아버지의 길을 선택한 아들을 향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 배어 있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지 않은 미래에 내가 겪었던 절망과 내가 품었던 질투와 나를 일깨웠던 가능성을 나의 아들이 그의 아들에게서 찾아내기를 소망한다. 내가 그러했듯이 나의 아들 또한 이 저주받은 세월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생명의 힘찬 약동을 경험하며 겁에 질리기를 소원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 특별한 생의 굴레를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내 아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 자녀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그 고통스러운 만남과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나처럼 살아 있어도 되는 이유를 찾고 눈물 흘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29쪽.

평생을 원고지를 품고 살아온 작가의 글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애정과 사랑이 평생토록 그를 글쓰기에 머물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떨림과 긴장에 부대끼며 최선을 다한 결과가 에이포 용지 두 장이다. 이것을 채우는 하루하루의 고통은 참아내기 힘들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까닭은 에이포 용지 두 장 분량의 글쓰기조차 허락받지 못한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밭을 갈고 글을 쓰는 건 모두에게 허락된 자유다. 농사는 여름 한 철만 참아내면 가을에 여문 작물이 수고한 이에게 주어지는 반면에, 글이라는 것은 제아무리 많이 쓴들 읽어주는 이가 없으면 일기나 메모같은 잔상에 머무른다. 글로 먹고산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주장, 경험을 모두의 것으로 환원시켜야만 하는 작업이다. 밭고랑은 마음 내키는 대로 갈아 엎는 것이 가능해도 글 한 줄, 단어 한 개가 미치는 정신의 성장은 결코 글쓴이의 소유가 될 수 없다. 80쪽.

그리고 나 또한 작가와 같은 크기는 아니지만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사랑으로 날마다 끙끙대고 있음을 보면서 다행인지 비극인지는 모르지만 뿌듯함을 느끼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내가 새벽에 밭으로 나가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은 심해를 닮은 블루블랙 잉크에 영혼을 맡기는 이유는 그 많은 좌절과 실패를 종이 위에서 견뎌온 지난날의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다. 또 하나, 다른 길을 찾아 나서기에는 시간도 촉박하고 그럴 만한 기회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행인지 비극인지는 아직도 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다. 81쪽.

한 작가의 글이 주저앉으려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공감을 받고 위안을 주고 다시 일으켜 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면 그의 글쓰기는 성공한 것 아닌가.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이 아닐까. 나도 작가처럼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쯤이면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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