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분량은 얄팍하고 글보다는 그림이 더 많다. 설명을 보니 그림 에세이라고 되어 있다. 아, 그림 에세이라는 것도 있구나 싶다. 제목에 끌려 뽑아 든 책이었다. 책 제목이 『걷는 여자』였다.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원제목을 살펴보니 『walking distance』이다. walking distance-보행 거리, 도보로 가는 거리 정도의 뜻일 건데, 『걷는 여자』로 붙인 것은 저자가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제목을 붙이는 편집자들의 의도와 발상이 언제나 흥미롭다.
저자는 리지 스튜어트라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이다. 그녀에 관한 정보를 책에 나와 있는 것에서 가져왔다. 저자의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약 3년 전 이 책을 집필할 때의 저자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나의 나이는 71살이다. 40년의 차이가 나는 저자의 글을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인생의 출발선에 막 들어 선 사람과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과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상당한 재미가 있었다. 이 글에는 페이지가 없다. 그래서 인용하는 글도 페이지가 없다.
난 도시를 걷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을 좋아한다. 특히 19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걷는 장면(<제2의 연인Heartburn>의 메릴 스트립이나 <폴링 인 러브Falling in Love>의 메릴 스트립,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의 메릴 스트립, <결혼 소동Crossing Delancey>의 에이미 어빙, <프랭키와 쟈니Frankie &Johnny>의 미셸 파이퍼, <베이빔 붐Baby Boom>의 다이안 키튼같은)을 좋아한다. 난 그들이 입은 품이 큰 외투와 패브릭 가방을 좋아한다. 느슨하게 걸쳐 입는 1980년대의 오버 사이즈 옷들은 그들의 걸음에 무게를 더한다. (사진 1 삽입)
나도 그렇다. 특별히 뉴욕 하면 큰 걸음걸이로 활기차게 걷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은 대부분 일과 관련되어 걷는다. 일하러 가면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비즈니스를 위해, 목적을 가지고 걷는 걸음은 힘차고 바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나의 걷기는 운동 목적이다. 운동을 위해 걷지만 일이 아닌 휴식의 개념이기 때문에 나의 걸음은 여유롭고 느긋하다. 어쩔 때는 운동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아까울 때도 있다. 일을 위한 걷기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늘 독신이거나 스스로 독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도 공감한다. 주체적이고 자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스스로 독신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은 공감한다. 독신이 아니지만 자신을 독신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일까. 또는 독신처럼 살아간다는 뜻일까. 저자는 31살의 독신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다 거쳐 온 나도 지금은 독신처럼 살아간다. 자식들은 독립하여 다 떠났고 남편과도 서로 매이지 않는다. 보살핌이나 보호에서 놓여났다는 뜻이다. 숙제와 같은 삶의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다시 혼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지금 나는 독신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유와 여유를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걷기의 조건은 매우 명확하다. 우선 길이 보행로여야 한다. 자동차에 치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빠르게 달리는 택시에 놀라 ‘으악’히고 소리를 지를 필요도 없는 보행로 말이다. 나는 보행로를 걷는 것을 좋아하고 늘어선 상점 앞을 걷거나 보행자들과 마주치는 것을 좋아한다. 어찌 보면 정말 평범한 걷기라 할 수도 있다.
저자의 걷기는 도심 속 보행로를 활보하는 것이다. 나는 산책로를 걷는다. 도심 속, 사람들 사이를 걷는 것이 아니라 공원이나 둘레길, 인적이 드문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우리나라는 산책로와 둘레길을 너무 잘 만들어져 있다. 어디를 가도 걸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접근하기도 쉽다. 걷기에는 참으로 좋은 환경이다. 걷는 인구도 많다. 나는 안전한, 그리고 한적하고 호젓한 산책로를 걷는다.
엄마가 30대 초반에 입었던 옷들을 지금 나와 친구들이 입고 있다. 테이퍼드 진과 오버 사이즈의 가을 점퍼 그리고 은 액세서리, 롤업이 되고 색이 바랜 ‘맘 진’은 우리의 젊음을 상징하며 전 세계적으로 ‘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서도 ‘맘 진’이라 불린다. 내가 엄마가 서른한 살 때 입던 옷을 입는 것은 엄마가 당시 느꼈던 감정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자 해서일까? 아니, 아마도 그런 건 아닐 거다. 나는 그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최악의 경우에는 게으르게 반복되는 패션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천 조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집을 나서면서 엄마와의 어떤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나는 우리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를 들이대거나 유전학과 가족사의 광기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전히 친구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70대가 되니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요양원에 잠깐 계셨는데 그때 이미 어머니의 것이라곤 작은 서랍장에 넣을 수 있는 속옷과 겉옷 몇 벌이 전부였다. 황망하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니 어머니의 소지품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생전에 입으라고 주신 파자마 한 벌이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으로 남았다. 그 파자마를 어머니의 분신처럼 생각하며 잠옷으로 계속 입었는데 얼마나 입었는지 낡아서 속이 다 비칠 정도로 해어졌다. 더 입으면 완전히 구멍이 날 거 같아서 입지도 못하지만 버릴 수가 없다, 낡은 파자마마저 버리면 어머니의 손길이 남은 것이 나에게는 하나도 없다는 생각과 파자마마저 사라지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도 약간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 낡은 파자마를 장롱 안에 모셔두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어머니와 연결의 끈이다.
나는 우리가 한 집단 또는 다른 집단을 공개적으로 설명하거나 무엇이 절대적이고, 올바른 행동인지를 말할 때 절반으로 나뉜 각각의 입장만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우리 편과 그들 편으로 나뉘어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편에 대한 공격성과 혐오를 드러내고 그들을 각성하게 하기보다 탓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나는 어떤 주장이나 어느 편에 절대적으로 서 본 적이 없다. 항상 중도의 편에 서거나 그 편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장의 취약점이나 상대편 주장의 긍정적인 점에 귀 기울이곤 했다. 그래서 나의 입장은 항상 단호하지 못했고 어정쩡했다. 어쩔 때는 완전한 신념을 가지고 소리 높여 부르짖는 사람들의 단호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지나친 자기 신념에 빠져 상대편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상태에 이르면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와 홀로 서곤 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자기 색깔이 없는 사람이었다. 검정도 흰색도 아닌 회색빛 주변인이었고 변방인이었고 경계인이었다. 이러는 나에 대해서 나도 싫고 나는 왜 절대적 신념을 가지지 못하는 가에 대한 회의도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검정과 흰색이 혼합되어 있는 회색이 더 많았고 회색도 참으로 다양하게 나눠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두 페이지를 할애하여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분명 의도적인 편집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영어 원문이 옆면에 살려있다. “But then, how do you live?” 직역하자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도 될 것이다.
31살의 저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한다.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한다. 71살의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본다. 올해 새해를 맞으면서 언제부턴가 계획을 세우지 않는 나를 깨달았다. 여태까지의 나는 계획을 세워야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었고 글로 써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계획을 세우지 않는 나를 발견하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계획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나에게는 이제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부지 중에 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제는 날마다 주어지는 하루가 가장 확실한 나의 미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의 미래, 하루하루 주어지는 짧은 미래를 꽉 채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새삼스럽게 하였다.
아이들 뿐 아니라 차, 집, 승진과 관계없이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직장인이고 수입과 집세를 스스로 관리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수입과 집세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다는 것이 내 결점일 수 있을까? 그저 내 스스로 만든 어리석은 기준으로 인해 어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경험으로 인한 판단일까? 제발 그런 건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도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부족하다 여기는 것보다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일 것이다.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질문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것만이 ‘어른’이 되는 것일까. 이런 통념에 따른다면 아직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아 키워보지 못한 자신은 ‘어른’이 되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지만 나는 ‘어른’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처럼 나이 많고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이 어른일까? 상식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어른으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로 생각한다면 ‘어른’이란 자기의 일을 감당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나눠주고 기여하는 사람이다. 자기 몫의 삶을 당연히 감당하고 세상과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규정하면서 나는 과연 ‘어른’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블룸즈버리 거리를 지날 때마다 버지니아 울프가 얼마나 밤 산책을 좋아했는지를 떠올린다. 그녀는 밤 산책을 하기에는 겨울이 가장 좋다고 했는데 그녀 말이 맞았다. 든든히 챙겨 입고 익명으로 따뜻하고 사교적인 곳으로 가는 길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익명성은 런던 최고 장점이자 단점이다. 나는 익명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동네 어디까지든 걸어갈 수 있어 안도한다.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들 무리 속으로 사라져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나도 겨울을 좋아한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아진 나는 겨울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위험해서 겨울에는 한낮을 산책의 시간으로 잡는다. 또 날씨를 핑계 삼아 외투와 목도리와 마스크로 무장하여 서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 무장을 하고 걸으면서 사람의 무리 속에서 홀로 있는 섬 같은 느낌을 즐긴다.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을 찾기보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를 원하는 이 심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익명성을 보장받기를 원하고 침해당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아는 척해 주기를 바라는 쓸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내 삶의 형태를 찾으려고 노력 중인 듯하다. 그건 어찌 보면 불필요한 일이겠지만 나는 끊임없이 내 삶의 형태를 찾는 데 열성을 기울이는 것 같다. 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대략 같은 공간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일까?
31살의 저자는 자기 삶의 형태를 찾으려고 모색 중이다. 앞으로 자기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가치를 찾고 있다. 71살의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에 가치를 두었으며 내가 살아 방식과 기준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까지 볼 수 있다. 어쩌면 내 삶의 가채점표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잘못되었거나 부족했던 부분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나의 진짜 성적표를 받아 들 때까지 계속 성찰하고 수선하고 보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걷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걷는 것이 왜 나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지 알아내려 애쓴다. 나는 그것이 불확실한 사람인 나를 확고하고 능력을 갖추고 전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걷는 것이 나를 머릿속을 떠나 세상으로 나오게 하기에 좋아한다. 걷기는 내가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제 나는 걷기가 인간이 본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최초의 이동 수단은 이 걷기였다. 그러다가 인지의 발달로 탈 것들이 생겨나면서 우리는 걷기를 잊어버렸다. 걷기의 필요성까지 망각해 버렸다. 그러나 본능적 걷기 욕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에 있든지 걷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고 걷기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걷지 못하는 상황이 있더라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걷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