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차이는 양으로만 구분되는 게 아니다. 소설을 쓰는 기법에서 확연히 달라진다. 장편소설은 작가의 인생관과 사상이 소설을 끌고 가는 데 크게 작용하지만, 단편소설은 위트와 기지, 그리고 반전이 크게 작용한다.
오헨리는 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1862년~ 1910년)인 미국의 소설가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 집에서 자란 포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촌이 경영하는 약국의 조수로 들어가서 일을 거든다. 제도사, 은행원, 기자 등의 직업을 전전하던 포터는 17살에 결혼하면서 우체국의 고정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전에 근무하였던 은행에서 횡령을 하였다는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부인이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횡령죄로 5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복역 중에 포터는 오헨리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이름을 알린다. 감옥에서 출옥한 후 오헨리는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면서 약 380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오헨리는 단편소설에서 대단한 장기를 발휘하여 '현대 단편소설의 모범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오헨리의 단편집에 실려있는 「Springtime a la Carte」인데, 우리말로는「차림표의 봄」또는「식탁에 찾아온 봄」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짧은 단편이지만 오헨리 특유의 문장과 위트와 반전이 기가 막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3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뉴욕의 아가씨인 새러는 차림표를 보면서 울고 있다. 새러는 상업학교 속기과를 막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사회 초년생이다. 그녀의 속기 실력은 아직 형편없어서 사무실에 정식으로 취직하지 못하고 타자나 복사와 같은 어정쩡한 일을 맡아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 나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자신의 셋집 이웃에 있는 실런버그 씨의 가정식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타자하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새러는 그 레스토랑에서 40센트에 다섯 가지 요리가 나오는 정식을 먹고 나서 그 집의 차림표를 얻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차림표는 영어라고도, 독일어라고도 할 수 없는 글씨체로 쓰여 있어서 누구도 읽어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다음날, 세러는 ’전채(前菜)‘로 시작되어 마지막에 ’ 외투나 우산을 잊지 마세요 ‘라는 글씨에 이르기까지 요리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하고 알맞게, 보는 사람의 식욕을 돋우도록 아름답게 타이핑하여 실런버그씨에게 보낸다. 깔끔하고 친절하게 정리된 차림표를 보고 실런버그씨는 그 자리에서 새러와 계약을 맺는다.
새러가 맡은 일은 그 식당 안 스물하나의 식탁에 차림표(디너의 차림표는 그날그날 새로 치고, 아침식사와 점심 차림표는 요리가 바뀌거나 차림표가 오래되어서 더러워졌을 때마다 새로 만든다는 조건으로)를 타자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보수로는 날마다 하루 세 차례의 식사를 웨이터가 새러의 방으로 배달해 주는 것이다. 이 이런 계약의 조건은 두 사람을 다 만족시켰다.
글을 읽으면서 오헨리의 표현력과 문장력의 탁월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달력이 넉살 좋게 봄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때가 왔다. 봄은 제철이 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 법이다. 1월에 내린 눈은 아직도 도시를 가로지르는 길에 금강석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손풍금은 변함없이 12월의 활기와 가락으로 <그리운 여름은 가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활절에 입을 나들이옷을 사려고 한 달 뒤에 지불할 수표를 끊기 시작했다. 관리인들은 스팀밸브를 잠갔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해도 거리가 아직 겨울의 입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94쪽.
마치 우리가 요즘 겪는 날씨를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꽃샘추위라고 말하는 것을 오헨리는 ’ 달력이 넉살 좋게 봄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때가 왔다.‘ 고 표현한다. 기가 막힌 표현력이다.
어느 날 오후 새러는 삐걱거리는 밤나무 흔들의자에 앉아 슬픈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새러는 지난여름, 시골에 갔다가 한 농부를 만났다. 서니브룩 농장에서 두 주일을 머물렀는데 그 농장 주인의 아들인 젊은 농부 월터 프랭클린과 사랑에 빠졌다. 월터와 새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확인한다. 월터는 그늘이 많은 오솔길에서 민들레를 엮어서 화관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노란 민들레꽃이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봄의 첫 징조가 나타나면 결혼하자고 약속하고 새러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최근 월터로부터 2주일 동안이나 편지가 오지 않자 새러는 슬픔과 걱정에 싸인 것이다.
저녁 무렵이 되자 실런버그 씨네 가게의 다음날 차림표가 배달되었다. 새러는 슬픈 마음으로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차림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차림표는 봄을 알리는 요리들로 바뀌어져 변경이 많았다. 새러는 손이 무척 빨라서 평소에는 스물한 장의 차림표를 타이핑하는 데 1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러의 손가락은 타이프라이터 위에서 여름 시냇물 위의 작은 곤충처럼 춤추었다. 그리고 글자 수에 따라 하나하나의 요리를 적당한 위치에 정확히 배치하면서 항목마다 타이프라이터를 쳐 나갔다.
그러다가 새러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그녀의 마음속 거룩한 절망의 밑바닥에서 가슴으로 복받쳐 올라 눈에 괴었고 톡탁톡탁 타이프를 쳐 나가면서 흐느껴 울었다. 차림표의 다음 품목이 민들레, 달걀을 곁들인 민들레 요리였기 때문이었다. 민들레, 월터가 황금빛 화관을 만들어 그녀를 사랑의 여왕으로, 미래의 신부로 만들어준 꽃인데.... 민들레, 봄을 미리 알리는 꽃, 가장 행복했던 날을 회상케 하는 꽃이었는데....
여섯 시가 되자 웨이터가 저녁식사를 가져오고 타이핑한 차림표를 가지고 돌아갔다. 테이블에 앉아 새러는 한숨과 함께 달걀을 얹은 민들레 요리를 옆으로 밀어버린다. 사랑을 간직한 민들레꽃이 거무스름한 채소 덩어리로 변해 버린 것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저녁도 먹지 않고 새러는 7시 반이 되자 책을 꺼내어 독서를 시작한다. 트렁크에 두 발을 올려놓고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긴 방랑의 여행을 떠난다.
그때 현관벨이 울렸다. 인기척과 말소리에 새러는 방바닥에 책을 내던지고 문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새러는 그녀의 농부가 층계를 세 단씩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농부는 이삭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녀를 베어 곡식창고에 쌓아 내렸다. 98쪽.
그동안 왜 소식이 없었느냐는 새러의 눈물 섞인 투정에 월터는 새러의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직전에 새러는 이사를 하였고 주인은 그 집을 모른다고 했다. 월터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새러가 이사 간 집을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경찰서에까지 갔지만 새러의 종적은 묘연하였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느냐는 새러의 질문에 젊은 농부는 봄기운이 가득 찬 미소를 떠올렸다. 젊은 농부는 우연히 이웃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고 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없을까 하고 예쁘게 타이핑된 차림표를 살폈다고 했다. 그리고 양배추 다음 글씨를 보는 순간 주인을 불러서 새러의 주소를 물어 알아냈다고 했다.
“기억하고 있어요.” 새러는 행복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양배추 다음은 민들레였어요.”
“온세계 어디에 있어도 행에서 툭 튀어올라간, 독특하게 구부러진 대문자 W를 보면 타이프라이터가 새러 것인 줄 알 수 있어.” “어머, 민들레 철자에는 W자는 없을 텐데.” 새러는 놀라면서 말했다. 청년은 호주머니에서 차림표를 꺼내어 그 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새러가 그날 오후에 첫번째로 타자한 차림표였다. 오른쪽 위 귀퉁이에 눈물방울이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목장의 풀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는 황금빛 꽃의 잊지 못할 추억에 이끌려 전혀 다른 글씨가 타자되어 있었다.
빨간 양배추와 속을 채워 넣은 피망 사이에 있는 품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삶은 달걀을 곁들인 그리운 월터!” 99쪽.
기가 막힌 반전이지 않은가. 이런 위트, 이런 기지의 소설을 쓸 수 있었으니 오헨리가 아니겠는가. 그의 재능이 부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