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로

by 선희 마리아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 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중략) 나를 숨겨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박완서(1931~2011)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서.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5.1.14(화) 28면.

------------------

박완서 님이 보고 싶다. 선생님 생전에 뵌 적 없지만 마음속에 선생님으로 남아 계신 분.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늦었다는 나이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우리 문학계를 놀라게 했던 선생님,


여전사와 같이 생각했던 당시 여성 활동가들의 이미지를 바꾸게 했던 이웃 아줌마와 같이 평범하고 편안하고 수줍은 웃음을 띠고 나타났던 분.


그렇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릿발 같은 엄정함과 솔직함과 기탄없는 지적들은 얼마나 우리를 시원하게 했던가. 은폐와 눈가림과 위장의 포장을 한 순간에 벗겨버리는 소나기 같은 서늘함. 여자의 자리와 위치를 새롭게 잡게 하셨던 선생님.

뼈저린 삶의 진액을 짜내던 선생님의 글들도 그립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보고 싶다,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잘 산 것 아닐까.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들었던 나를 꺼내 내 삶을 계산하는 날,

나를 숨겨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날,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나를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날,


나도 이런 위로를 듣고 싶다.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