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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

by 선희 마리아
타인의 삶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본다. 또한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마음을 쓰는 일 중 하나는 삶을 잘 끝내는 것, 즉 평온하고 고요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저서이자 에세이의 원조로 알려진 『에쎄』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대목을 추려 엮은 『좋은 죽음에 관하여』(박효은 옮김)에서.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4.12.17.(화) 32면.

참으로 안타까운 장례식에 다녀왔다.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한 남편이, 아빠가 갑작스러운 기계 오작동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집에서 떠난 지 불과 두어 시간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삼일 만에 그의 흔적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례식은 애절함 그 자체였다. 별안간에 미망인이 되어버린 젊은 아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은 하도 울어 꺽꺽거리는 쉰 목소리로 울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찍어댔고 훌쩍이며 울었다. 무슨 위로가 소용 있겠는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모두들 부둥켜안고 울지만 갑작스럽게 영정 사진에 올라앉은 남편은, 아빠는 말이 없었다. 사고의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장례가 치러지는 중간에 검은 상복의 아내가 일어나 휘청휘청 관 앞으로 나가 관을 끌어안았다. 관을 덮은 명정을 여기저기 매만지면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 쌍둥이 아들과 딸이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끌어안았다. 주인 잃은 새새끼들처럼 남겨진 세 가족은 함께 부둥켜안고 마지막 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볼 수 없는 애절한 광경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관에 두 손을 펴고 관에 엎드려서 짐승같은 소리로 울음을 쏟아냈다, 딸은 엄마와 둘이 바닥에 주저앉아 마주 안고 울었다.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말려서도 안 되는 한 가족의 마지막 이별 의식이었다.


그런데, 난 그 가족의 슬픔을 보면서 남자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너무도 엄격하고 기계처럼 분명했던 아버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 한번 듣지 못하고 자랐다. 항상 아버지 앞에서 이유 없이 기가 죽었고 쩔쩔매었다. 아버지는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그 아버지는 유독 차가웠고 근엄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결혼 후에도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성심껏 했고 부모님은 아들의 효도를 당연하게 받았다. 냉정하고 차가웠던 남편 곁에서 시들어가던 어머니는 칠십을 갓 넘긴 나이에 치매에 걸려 요양원으로 떠났다. 아들은 혼자된 아버지를 수시로 찾아뵈면서 모든 살림을 도맡아 했다. 말없이 순종하고 착했지만 그 아들의 어깨에 실린 삶의 무게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아들이 결혼 후에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인정받고 사랑받던 아버지였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근엄했던 아버지는 먼저 떠나는 아들의 관 앞에서 사랑한다고 울면서 말하였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무에 그리 어려웠을까.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한 사람의 삶에서 잘 죽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을 떠날 때 사랑받고 떠나야 한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남기고 떠나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해야 하고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남은 자들이 남겨진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야 한다. 사랑하며 살아도 다 못하고 떠나는 게 인생일진대 사랑하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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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