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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패터슨,『내가 사랑한 야곱』

by 선희 마리아

『내가 사랑한 야곱』은 소외받고 차별받는 13살 어린 소녀인 쌍둥이 언니가 겪는 성장소설이다.


『내가 사랑한 야곱』 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의 모티브는 성경 구절에서 가져왔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의 동생이다. 장자권이 명백하고 확실하던 그때에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 간발의 차이로 동생이 된다. 집에 머물며 어머니를 돕기 좋아하던 야곱은 사냥을 좋아하는 형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피곤하고 배고픈 틈을 이용하여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는다. 에서를 사랑하는 이삭은 나이가 많아 죽게 되었을 때 에서를 불러 축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야곱을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가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 받게 하려고 야곱을 부추겨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게 한다. 장자의 축복권은 받아냈지만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고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와 20년이 넘게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책의 제목이 되는 『내가 사랑한 야곱』에서 야곱을 사랑한 나는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말 1:21-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것이다. 즉, 야곱을 사랑한 사람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이었다. 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서도 야곱을 사랑한 분은 하나님으로 나온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로마서 9장 13절)에서도 야곱을 사랑한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성경의 또 다른 곳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겠다고 예언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내가 사랑한 야곱』에서처럼 하나님이 쌍둥이가 태어날 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고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고자 하셨다는 것이 야곱과 에서의 인생을 설명하는 이유가 될까? 그리고 그 이유에 우리는 납득당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한 야곱』의 지은이는 캐서린 패터슨이다. 캐서린 패터슨은 1932년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돌아와 킹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했으며, 리치몬드 대학원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육을 전공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정착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78년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1981년 『내가 사랑한 야곱』, 1979년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로 세 차례나 ‘뉴베리 상’을 수상했다. 또한 아동청소년문학에 끼친 공헌을 인정받아 1998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2006년에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수상했다.


『내가 사랑한 야곱』의 줄거리는 성경에서처럼 쌍둥이로 태어난 두 자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서술이 사랑받는 동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무관심과 소외의 대상이었던 언니의 관점으로 쓰여졌다.

체서피크만에 자리 잡은 작은 섬 라스에서 살고 있는 사라 루이스 브래드쇼와 캐롤라인 브래드쇼는 쌍둥이 자매이다. 두 자매의 아버지는 이백 년 넘게 대대로 그 마을에서 살아오는 브래드쇼 집안사람으로 게잡이와 굴따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그러다가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 맹렬하게 일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부는 어느 해 라스 섬의 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온 선생님과 결혼한다.

아빠가 완전히 체력을 회복하기 전 어느 가을, 어느 젊은 아가씨가 섬의 학교(교실 셋에 체육관 비슷한 건물 하나가 딸린)에 교사로 부임해 왔고, 난 도무지 이해가 안되지만 이무튼 우아하고 조그마한 여교사는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붉은데다 다리까지 저는 아빠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렀다. 27쪽.

그리하여 두 사람은 쌍둥이 딸을 낳게 되고 주인공인 나는 몇 분 차이로 언니가 된다.

아빠가 아내 이상으로 필요로 했던 것은 아들이었다. 라스 섬에서 아들은 부와 안정을 상징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딸들을, 그것도 쌍둥이 딸들을 낳아 주었다. 나는 몇 분 차이로 언니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 몇 분을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그 몇 분은 내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내 평생 유일한 시간이었다. 캐롤라인이 태어난 순간, 사람들의 관심을 캐롤라인에게 몽땅 뺏기고 만 것이다. 28쪽.

그 이후 나는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아 애를 태우고 병약하였던 캐롤라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 엄마와 할머니는 캐롤라인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어르고 달랬는지를 말하고 ‘ 아기고양이 울음소리보다 더 작았던’ 첫 울음을 캐롤라인이 터뜨렸을 때 얼마나 기쁜 함성을 질렀는지를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럼 난 어디 있었어요? 다들 캐롤라인에게 매달려 있을 때 난 어디 있었어요?” 한번은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의 눈에 구름이 드리우는 걸 보니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바구니에 있었단다. 할머니가 널 목욕시키고 옷을 입힌 뒤 바구니에 눕혀 놓았어.” 엄마가 말했다. “그랬어요, 할머니?” “낸들 어떻게 알겠니? 얼마나 오래된 일인데.” 할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다시 한 번, 태어나자마자 옆으로 팽개쳐져 잊힌 신생아가 된 것 같았다. 29쪽.

그 이후 동생보다 더 튼튼하게 태어난 죄로 쌍둥이 언니는 여섯 살 무렵부터 바다에 나가 굴을 따고 게를 잡는 아빠의 일을 도우면서 아들 노릇을 하면서 부모님과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모든 면에 걱정을 끼치지 않는 딸이지만 부모님에게는 가치있는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걱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캐롤라인은 늘 확신에 차 있고 어딜 가나 존재하며 매사에 느긋하며 굉장히 밝고 황금처럼 빛나는 존재였지만, 나는 온통 잿빛의 그늘진 존재였다. 나는 추하거나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랬다면 오히려 더 나았을지 모른다. 괴물은 기형적인 모습만으로도 늘 남의 주의를 끄니까. 장애아나 몹시 추하게 생긴 아이의 부모가 으레 그렇듯 엄마 아빠는 손을 꼭 쥐고 어떻게든 나를 챙겨주려 했을 것이다. 53쪽.

나는 요셉처럼 꿈속에서 캐롤라인에게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싶었다.

나는 가족들이 내 존재를 깨닫고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한 모든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줄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나의 아주 터무니 없는 공상 가운데는 성경 속 요셉(* 야곱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로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의 꿈에서 비롯된 장면이 있었다.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모든 형제들과 부모님까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캐롤라인이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상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캐롤라인이 비웃으며 거절했지만, 그러자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서 캐롤라인을 떼밀어 앉혀 무릎을 꿇게 했다. 캐롤라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 휘즈.” 캐롤라인이 사과하기 시작했다. “날 더 이상 ‘휘즈’라고 부르지 마. ‘사라 루이스’라고 불러” 나는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두 살 때 이후로 캐롤라인이 나를 얕잡아 부르던 별명을 벗어 던진 것이다. 55쪽.

그렇지만 이것은 꿈이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모든 사랑과 관심과 행운은 캐롤라인에게 집중되고 나는 캐롤라인을 질투하는 것조차 내색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명랑했고 사랑받는 캐롤라인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콜과 선장 할아버지까지 빼앗아 간다.

때로 나는 하나님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하나님이 소름 끼칠 정도로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것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내 분노는 언제나 자책으로 바뀌었다. 나의 사악함은 용서받지 못할 죄였지만 나는 죄인인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하나님께 빌었다. 하나님은 살인에 간음까지 범한 다윗을 용서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얼마 뒤, 다윗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총애하는 인물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용서해 주셨다. 살인을 했던 모세는 어떠한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돌팔매질하는 사람들의 웃옷을 맡아 주었던 바울은? 100쪽.

내가 받는 불공평함에 대해 분노하던 나는 어느 날 유일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선장 할아버지에게 참아왔던 나의 분노와 억울함과 불공평함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위로하기를 바랐던 선장할아버지의 일갈을 듣고 크게 당황한다.

"여기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어요. 그렇다고 도망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쳇!"
"네?"
할아버지가 낸 소리를 정확히 들었는지 내 귀를 의심했다.
“쳇, 쓸데없는 소리. 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난 너를 만난 첫날부터 그걸 알았다고. 내 잠망경 맞은편의 널 본 순간부터."
” 하지만.....“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뭐지?“
나는 완전히 멍해졌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뭐였지?
”그걸 몰라?“
할아버지의 물음은 거의 조롱에 가까웠다. 나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했다.
” 네 동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어.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던 거야.“
나는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할아버지는 입 다물라는 듯 손을 저었다.
”사라 루이스, 아무도 네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기회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가 만드는 거야. 얘야, 하지만 먼저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아야 한단다.“할아버지의 어조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281쪽.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섬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그 마음 밑바닥에는 부모님에게, 라스 섬에, 할머니에게 잊혀질 것을 두려워해서 꼭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라스 섬을 떠나 공부를 시작하였고 조산 전문 간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라스 섬에 들어와 아버지와 결혼하였던 것처럼 의사를 구경할 수 없는 산골을 찾아 들어가 산모들을 돌보기 시작하고 아내가 몇 해 전에 죽은, 아이가 셋 딸린 남자와 결혼을 한다.


어느 해 11월 눈이 50센티가량 쌓인 날,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쌍둥이를 출산하는 산모집에 혼자 가서 아기를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첫 번째 아이는 수월하게 나왔다. 그런데 두 번째 아이가 아주 작고 거꾸로 있는 것을 보고 산모의 자궁에 손을 넣어 머리부터 꺼냈다. 밖으로 나온 여자 아이는 거의 죽을 것처럼 창백하였고 울지 않았다. 나는 아기의 작은 입술에 숨을 불어넣어 겨우 울게는 하였지만 몸이 너무 차가워서 금방 죽을 것을 느꼈다. 나는 아기를 감싸 품 안에 안고 부엌으로 가서 화덕에 무쇠 솥을 걸고 행주와 수건 등으로 두껍게 깐 뒤에 아기를 그 안에 눕혀 따뜻하게 한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 아기의 뺨에 분홍빛이 흐르는 것을 보고 안심하게 된다. 그런 뒤에 나는 건강하게 먼저 태어난 다른 쌍둥이 아이를 생각해 낸다.

” 다른 쌍둥이는 어디 있죠? “
나는 갑자기 떠올라 물었다. 사내 아기를 잊고 있었다. 그 아기의 쌍둥이 여동생을 돌보느라 경황이 없어 사내아기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아기를 어디다 뒀어요? “ ”바구니 안에서 자고 있어요. “ 아기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기를 안아 주세요. 할 수 있는 한 오래 안아 주세요. 아니면 아기 엄마가 안아 주게 하세요. “ 312쪽.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열등감과 불공평한 대우에 한없이 쪼그라든 한 소녀가 어떻게 그 열등감을 극복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에서를 생각하였다. 에서의 잘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왜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면 에서는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작정되고 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까. 아버지의 장자 축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갔던 에서의 심정은 후회의 삶을 살아갔을까. 분노의 삶을 살아갔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의 생각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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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