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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눈물 상자』

by 선희 마리아

동화를 좋아한다. 한동안 심각하거나 머리 아픈 주제, 분량이 많은 책들을 읽었더니 따뜻하고 가볍고 아름다운 내용의 글을 읽고 싶었다. 따뜻하고 가볍고 아름다운 내용의 이야기라면 단연 동화 같은 이야기나 동화를 말할 것이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 속에 동화책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도서관에서 한강 작가의 동화를 찾았더니 『눈물상자』가 검색되었다. 찾아서 표지를 보니 책표지에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적혀 있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 내가 찾고 있던 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니던가.


어른이 되니 울 일이 없어졌다. 울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울 수 없게 되었거나 울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렸을 때는 울고 나면 무엇인가가 씻겨 나간 듯이 개운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 되어 울지 못하니까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먼지 가득한 거리처럼 머리와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고 맑지 못한 느낌이 있다. 뿌연 안개나 먼지 등이 내려앉아 흐릿한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다.

정식으로 소리 내어 울지는 않지만 수시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꼬리 쪽으로 흐르는 눈물을 느낄 때가 많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눈꼬리로 약간의 눈물이 흐를 때는 예기치 않은 순간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지난 주일에는 부활절 찬양을 하다가 갑자기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민망했던 것 같을 때이다. 연녹색 신록이 싱그럽게 올라오고 짧게 개화한 봄꽃이 바람과 비에 속절없이 떨어질 때, 작은 아이들이 두 발로 아장아장 걸을 때, 자기 손으로 먹겠다고 서투른 숟가락질로 얼굴 가득 밥풀을 묻힌 아이를 볼 때, 저보다 더 큰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는 아이를 볼 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름다움의 구성요소 중에 반드시 슬픔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때마다 아련하게 슬퍼진다고 생각한다.



『눈물상자』의 줄거리는 이렇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옛날, 한 마을에 ‘눈물단지’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예측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눈물을 흘렸다.

이른 봄날, 갓 돋아난 연둣빛 잎사귀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걸 보고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거미줄에 날개가 감긴 잠자리 한 마리를 보고는 오후가 다 가도록 눈물을 흘렸고, 잠들 무렵 언덕 너머에서 흘러든 조용한 피리 소리를 듣고는 베개가 흠뻑 젖을 때까지 소리 없이 울었다. 하루 일에 지친 엄마가 흔들 의자에 앉아 쉬는 저녁 무렵, 길고 가냘픈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진 걸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키우던 개가 열 시간 동안 진통을 하며 새끼 여섯 마리를 낳는 걸 지켜본 뒤로는 개들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검었고, 물에 적신 둥근 돌처럼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비가 내리기 직전, 부드러운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마를 스치거나. 이웃집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뺨을 쓰다듬기만 해도 주르륵 맑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6쪽.

이런 아이 때문에 엄마는 걱정을 했고, 아빠는 화를 냈으며, 친구들은 “눈물단지, 울보”라고 놀려댔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이상한 아저씨가 아이를 찾아온다. 아저씨는 자기를 눈물을 모으고 파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십여 년에 걸쳐 수집한 눈물들을 보여 주면서 자신은 ‘순수한 눈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내가 찾고 있는 건 순수한 눈물이야.”
“순수한 눈물이요?”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 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이란다.” 17쪽.

그러면서 아저씨는 아이의 눈물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저씨의 부탁을 받은 후로 아이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만 하루 동안 아이가 눈물 흘리기를 기다리던 아저씨는 저녁이 깊어지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려고 한다. 아저씨는 아이에게 자기가 수집한 눈물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더 늦기 전에 그 사람에게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이에게 악수를 청하고 떠나간다.


아저씨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어두워지는 언덕 아래로 걸어내려가다가 멈춰 서서 아이를 한 번 돌아본다 그때 아저씨의 검은 소맷부리 속에 들어 있던 파란 새벽 빛깔의 휘파람새가 아이를 돌아보며 날개를 흔든다. 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어서 이리로 와.’
투명한 물처럼 쏟아지는 달빛 아래 새는 은청색 깃털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조용한 몸짓은, 마치 목소리를 들려주는 듯, 단지 그 목소리를 귀로 들을 수 없을 뿐인 듯 이상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어서. 우리랑 같이 가.’
그렇게 속삭이는 말이 분명히 들린 것 같았다. 21쪽.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아저씨를 따라가겠다고 나선다. 아저씨는 놀라지 않고 아이와 함께 길을 떠난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걸어 산을 넘는다. 산자락의 끝에 이르렀을 때 아저씨는 잠시 쉬면서 눈을 붙이고 가자고 한다. 아이는 눈에 가득 들어오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오는 걸 느낀다. 그렇지만 그 눈물은 아저씨가 바라는 순수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막막함에 가깝다는 걸 알고는 아저씨가 보지 않게 눈물을 훔친다. 아이는 아저씨에게 순수한 눈물에 대해 묻는다.

아저씨는 불을 뒤적여 감자를 꺼내며 대답했다.
“세상의 모든 눈물이 태어나기 전의 눈물.”
“ 태어나기 전이요?”
“ 세상의 모든 눈물이 죽은 뒤의 눈물.”
“ 죽은 뒤요?”
“ 세상의 모든 눈물들 사이에 고인 눈물.”
점점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 그 눈물에 닿는 것만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도 천천히 녹기 시작한단다.” 26쪽.

아이와 아저씨는 그렇게 이틀이 넘게 걸려 눈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마을에 도착한다. 눈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깡마른 몸에 흰 모자를 쓰고 옷과 구두도 흰색으로 입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아기였을 때 이후로 평생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사랑했던 아내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남편이 무서워 자기를 떠났을 때도 울지 못했다. 가슴이 무너지고 찢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슬픔 때문에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눈물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직접 흘려보고 싶어서 눈물을 사고 싶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저씨에게 주고 아저씨의 눈물상자 속에 들어있는 눈물의 절반 이상을 산다. 그리고 그 눈물들을 한 방울씩 입 안에 넣고 삼키기 시작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할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흐느낌이 주름진 손가락들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거푸 눈물을 닦아냈다. 흥건히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았고, 울음이 격해지자 옷자락으로 마구 문질러 닦았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버지....아버지.”
" 가지 말아.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45쪽.

처음에 흐느껴 울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웃음과 울음이 섞인 울음을 울다 펄쩍펄쩍 뛰면서 괴상한 춤을 추기도 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할아버지의 울음은 가라앉는다. 할아버지의 온몸은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고 몹시 지쳐 보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할아버지의 얼굴은 생기있게 빛나고 음울했던 목소리는 맑게 들렸다.

새벽빛이 창으로 스며들어 올 무렵 할아버지는 짐을 챙겨 집을 떠나려고 했다. 평생 집을 떠나고 싶었지만 가슴에 쌓인 슬픔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없었는데 이제 눈물로 그 슬픔들을 씻어냈으니 떠날 수 있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피리 부는 사람이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이는 떠나려는 할아버지에게 피리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꼭 한 번만 들려달라는 아이의 간절한 요청에 할아버지는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번 음을 가다듬고는, 희붐한 새벽창을 향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애잔한 곡조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아이의 눈이 가만히 젖었다. 이번에는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아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아이는 피리 소리에 온 귀를 기울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아저씨가 유리잔에 담아 간 것도 알지 못했다. 60쪽.

새벽빛이 아직 푸를 때 할아버지는 떠나고 아저씨는 비커와 알코올과 불꽃으로 아이의 눈물을 증류시켜 작은 결정으로 만든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 나자 아저씨는 아이에게 눈물을 보여준다. 궁금했던 아이의 눈물은 어떤 색깔이라고 말할 수 없는 투명하고 미묘한 수많은 빛으로 일렁이는 사랑이 가득한 눈물이었다.

“ 이 수많은 빛을 보렴.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눈물은 흔치 않단다.”
“그럼, 아저씨가 찾고 있던 순수한 눈물은 아니지요?”
아이는 조금 실망하고, 많이 부끄러워져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글쎄다. 순수한 눈물이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물을 말하는 게 아니야. 모든 뜨거움과 서늘함, 가장 눈부신 밝음과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담길 때, 거기 진짜 빛이 어리는 거야.”
아저씨는 가만히 팔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오히려, 네 눈물에는 더 많은 빛깔이 필요한 것 같구나. 특히 강인함 말이야. 분노와 부끄러움, 더러움까지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렇게 해서 눈물에 어린 빛깔들이 더욱 복잡해질 때, 한순간 네 눈물은 순수한 눈물이 될거야. 여러 색깔의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 물감이 되지만, 여러 색깔의 빛을 섞으면 투명한 빛이 되는 것처럼.”
아저씨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구나. 네가 단련될 시간이.” 64쪽.

동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구나. 숨겨진 눈물은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66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얀색은 두 가지라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얀색과 모든 빛이 섞인 하얀색. 본래의 흰색이면 좋겠지만 모든 빛이 가라앉아 만들어지는 흰색도 흰색인 것은 맞다.

또, 수채화 같은 순수 자체의 흰색도 좋지만 유화처럼 두껍고 깊게 가라앉은 무거운 흰색도 흰색인 것은 맞다.

인생의 수많은 시간과 일을 겪어낸 후의 빛깔이 어찌 인생을 경험하지 않았을 때의 빛깔과 같겠는가. 설령 같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아무것도 겪지 않은 무지한 삶이었거나 아무것에도 노출되지 않은 진공 같은 삶이었을 것이기에...


동화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본다. 흙탕물과 같은 곳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다듬어지고 다듬어져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투명한 새벽의 푸른빛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다 가라앉은 저녁의 푸른빛도 푸른빛일 것이기에.

한강의 작품을 읽어갈수록 한강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의 깊이와 맑음과 성찰과 글과 이야기를 사랑한다. 『눈물상자』로 나는 다시 힘을 얻어 또 얼마동안을 살아낼 것이다. 동화가 주는 치유요, 힘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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