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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어둠의 사육제」

by 선희 마리아

한강 소설가의 단편소설「어둠의 사육제」는 1995년 『동서문학』 여름호에 실린 작품이다. 한강이 소설가로 본격 데뷔를 한 것이 그 전 해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부터이니까 한강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은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모아 1995년 7월에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엮어내었다. 「어둠의 사육제」는 『여수의 사랑』에 실려 있는 6개의 작품 중 두 번째로 실려 있으며 가장 긴 분량의 작품에 속한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 소설의 궤적을 찾기 위해 『여수의 사랑』을 읽었다. 『여수의 사랑』에서 나는 표제작 「여수의 사랑」보다 그다음 작품인 「어둠의 사육제」에 더 깊이 끌리게 되었다. 한강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한강 소설의 특징을 ’범상치 않은 소재의 발굴,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문장, 아름답고 모호한 분위기’ 등으로 정리한 적이 있는데 「어둠의 사육제」에서도 이러한 한강 소설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둠의 사육제」는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주인공은 24살 먹은 영진이다.

영진은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도 더 깊이 들어가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딸만 일곱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난 영진은 주변의 관심도 받을 만큼 특출하지도 똑부러지지도 않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막내까지 일곱 자매 모두가 학교에 다니는 형편에 성적도 뛰어나지 못한 영진은 대학진학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고향 가까운 도시에서 여상을 졸업한 영진은 돈을 벌어 자신의 힘으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조그만 무역회사의 경리직을 얻게 된 영진은 석 달에 한 번 나오는 상여금을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 외의 모든 수입을 적금에 는다. 먹을 것, 입을 것을 극도로 아끼며 영진은 대입 수험서와 영문판 소설들을 사 읽으면서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영어 선생을 하며 번역을 하겠다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

사는 곳과 옷차림이 남루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눈밭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잠결에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는 뜨듯한 이부자리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어서, 그 솜털 같은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뒤끝이 쓴 행복감에 깔깔한 입맛을 다시곤 했다. 76쪽.

사 년 가까이 부은 적금이 만료되어 가던 초여름 무렵, 영진은 자기의 꿈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혼자 거리를 거닐다가 네 살 위인 인숙 언니를 만나게 된다. 같은 고향 마을 앞집에 살던 인숙 언니는 열여덟 살에 부모님을 모두 병으로 잃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는데 십 년 만에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찻집에 들어가 산동네 월세방을 전전하는 서로의 처지를 한탄하다 각자의 돈을 합하여 전세방을 얻어 함께 살기로 한다. 인숙 언니의 활약으로 두 사람은 널찍한 방에 부엌이 딸린 반지하방을 얻어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게 된다. 그렇지만 항상 피곤에 절어 있고 집에 돌아오면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인숙 언니와는 같이 살면서도 깊이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지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겨우 살아나게 된다. 중독이 심하여 병원까지 실려 가고 후유증으로 공장에서 일하다 쓰러진 뒤로 인숙 언니는 부쩍 우울해지고 날카로워지면서 짜증을 내는 빈도가 심해진다. 어느 날 인숙 언니는 누워있는 나에게 소리친다.

“ 너한테는 아직도 희망이 많지?” 그러던 어느 날 밤 인숙언니는 누워 있는 나에게 물었다. “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성실하니까 곧 대학에 갈 테지. 대학 나온 남자 만나서 우쭐거리며 살려는 거지, 그렇지?”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인숙언니는 대뜸 새된 소리를 질렀다. “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 되어 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인숙언니는 바르다 만 립스틱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치고 있었다. “언제나 나쁜 쪽으로만 흘러왔으니까.” “뭣 때문에...” 나는 정말로 주눅이 들어서, 더듬거리며 흥분한 인숙언니를 만류했다. “ 뭣 때문에 모든 게 나쁘게 되었다는 거야. 언니는 모아둔 돈도 있고 기술도 베테랑인데....” 인숙언니는 대꾸 없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81쪽.

유난히 추웠던 1월, 인숙 언니는 두 사람이 함께 마련한 전세금을 빼내고 쓸만한 가재도구를 모두 챙겨 사라져 버린다. 인숙 언니가 빼간 전세금의 절반은 영진이 지난 사 년 동안 키워 온 희망이었고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전부였는데 영진의 그동안의 인생 전체를 하룻밤에 털어가 버린 것이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영진은 책과 옷가지와 이불을 양손과 양어깨에 짊어지고 서울에 사는 유일한 친척인 이모네를 찾아간다. 엄마의 동생인 이모는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이모부 덕에 사십 이평의 아파트에서 딸 둘과 아들 하나와 함께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겨울이 지날 동안만 있게 해 달라는 영진의 호소에 이모는 거실 얖 베란다에서 지낼 것을 제의한다. 비닐장판이 깔린 베란다에 플라스틱 상을 가져다 책상을 만들고 책과 노트를 정리한 영진은 밤마다 거실 쪽 우윳빛 유리문에 기대앉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다 담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외투를 입고 이불을 감고 잠이 들어도 한 겹 베란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한기 때문에 새벽녘엔 어김없이 눈을 뜨곤 한다. 영진은 밤이 되면 사방에서 발톱을 세우고 덮치는 것 같은 어둠을 쫓아 버리려고 베란다 천장의 삼십 촉짜리 백열등을 밤새도록 켜놓는다.

그렇게 모멸스러운 동거와 궁핍한 시간을 견디면서 살아가던 어느 날 영진은 명환을 만나게 된다.

명환을 만난 것은 사월이었다. 영진을 만난 명환은 대뜸 영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집이 필요하지 않소?” 지난봄, 명환은 대뜸 나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집이 필요할 것 같아서 묻는 거요.” 100쪽.

그 사내를 영진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이모네 집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이 지난 휴일 아침, 베란다에서 이사하는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경비실에 기대어 있는 사내를 본 것이었다. 이모네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그날 이사하는 집의 젊은 가장은 지난해 여름밤 중형 승용차를 과속으로 몰고 가다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한 쌍의 젊은 부부를 치었다고 했다. 임신 오 개월이었던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사내는 한쪽 다리를 바퀴에 갈렸다. 명문 기업체 이사의 조카뻘이 된다는 젊은 가장은 다리를 잃은 사내에게 막대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어주고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내가 목발을 짚은 모습으로 그들 식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놀이터로 찾아와 그 집의 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노려보았으며, 그의 음산한 응시는 아이들이 공포 때문에 놀이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 젊은 부인이 혼자 집을 보는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 차 대접을 요구하기도 했다. 부인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커피를 내주었는데, 사내는 자신이 받은 배상금으로 층은 다르지만 같은 동의 아파트를 샀음을 고백한다.

“당신들 옆에서 살고 싶었소. 그게 이유의 전부요.” 104쪽.

나는 명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명환의 행복했던 시절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낸 젊은 부부였다. 행복했던 명환의 아내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도 그들이었다. 명환의 정상적인 걸음걸이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그들이었다. 명환은 자기의 행복했던 시절을 알고 있는 그들을 찾아 교통사고 전의 자신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교통사고 전의 모습과 단란했던 때를 보았던 그들을 통해 자기의 행복했던 때를 추억하고 그때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 계속된 사내의 집요한 감시와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젊은 부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 것이다.

“.... 그자가 어디로 이사를 했는지 알아내서 쫓아갈 수도 있었소.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오. 나 혼자 걸어보았던 싸움은 나 혼자 싱겁게 이겨버리고 말았소.... 그런데 이상하지. 그 식구들이 떠나니깐 난 혼자가 되어버렸소. 이 커다란 아파트에, 어찌되었든 나하고 상관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이 떠나고 나니까......” 흐흐, 명환은 짧게 웃으며 피우다 만 담배를 오른발의 구두 뒤축으로 짓이겼다. 신음 소리같은 웃음이었다. 123쪽,

영진에게 명환이 말한다.

“집이 필요하지 않소?” “뭐라구요?” “ 집이 필요한 거 같아서 물은 거요. 집이 있다면 베란다에서 잠을 자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오.” 108쪽.

명환은 십오 동 십사층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영진이 십육 동 십삼층에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명환은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켜지 않았다. 밤이 되면 맞은편 아파트의 베란다에 불이 켜지고 젊은 처녀 하나가 추운 겨울에 삼십 촉짜리 백열등을 켜고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베란다의 차가운 타일 바닥에서 잠이 드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했던 것이다.

영진은 뻔뻔해지기로 작정하고 온갖 수모를 참으면서 만기가 될 때까지 버티려고 했던 더부살이를 그만두기로 하고 석 달도 안된 적금을 해약하여 산기슭의 월세방을 계약한다. 이사를 떠나기 전날,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던 영진은 어두운 경비실 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명환을 발견한다. 명환은 누구에겐가 신호를 보내듯 담뱃불을 계속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영진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담뱃불 신호에 못 이겨 내려가서 명환을 만난다. 명환은 아침에 영진이 이사를 떠난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바로 십육 동 십삼층에 있는 영진의 베란다에서 십오 동 십사층에 있는 자신의 집을 한 번 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영진의 베란다 방으로 숨어 들어가 맞은편에 있는 불 꺼진 명환의 방을 바라본다. 그리고 명환은 영진의 부축을 거절하고 혼자서 내려간다.

아침이 되자 영진은 큼지막한 책 묶음과 또 한 묶음의 이부자리를 양손에 들고 어깨에는 세면도구와 속옷가지 등을 넣은 헝겊가방을 둘러메고 아파트 광장으로 나왔다. 주름투성이의 늙은 관리인이 초록색 고무호스로 광장 중앙을 향해 물을 뿌리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관리인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화사한 양산을 펼쳐 든 중년 여자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머리가 흔적도 없었대요. 핏줄기가 꽃밭까지... 그럼 그 집은 누가 가지는 거유? 일가친척도 없다든데. 날 때부터 고아였나 보죠? 원. 날 때부터 고아인 사람도 있답디까.... 부모가 있으니까 태어났겠지. 140쪽.

한강 문학의 진수가 느껴지지 않은가. 평범하지 않은 소재와 전개, 차분하면서도 끝없는 외로움과 슬픔과 가엾음으로 몰아가는 단단한 힘. 한없이 나약한 것 같은 데서 솟아나는 한 줄기 희망의 빛. 나는 한강 문학의 정착지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115쪽.

한강 문학의 또 하나의 탁월함은 아름다운 문장에 있다. 이런 문장 말이다.

어둠이 베어 먹다 밀고 뱉어놓은 살덩어리같은 달이 떠 있었다.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 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 혈흔(血痕)을 타고 번져 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들인 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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