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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by 선희 마리아
듣기는 신중함을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발언권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더 어려운 일이다. 듣기란 상냥하고 현명한 울림판이 되어주는 것이며 화자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특정 방식,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방을 지지하는 질 좋은 침묵을 통해 발언자가 빛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피에르 상소(1928~2005)의 『대화를 한다는 것』에서.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5.3.4(화) 28면.

작년 겨울 이후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소식을 듣지 않는다. 정보를 믿지 않는다.


허구의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끝없이 변명을 일삼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바닥을 보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다.


우리는 지나치게 말하지 않는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지 않는가. 말하기 공부는 배웠어도 듣기 공부는 배우지 않은 건 아닌가.


신중함을 증명하는 방식, 나에게 주어진 발언권을 지나치게 차지하지 않는 배려, 상대방을 지지하는 질 좋은 침묵이 미덕으로 인정받게 될 때는 언제일까.


현란한 말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듯이 난무하는 말속에 증오와 공격만 남게 될까 걱정된다.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의 올바른 발언에 박수치며 지지하는 멋있는 사람을 기대한다.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서 얻는 승리보다 넘어진 상대방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함께 뛰는 그릇 큰 사람을 보고 싶다. 수많은 실수와 잘못 중에서도 잘하는 것을 찾아내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싶다.


인간이란 모두 그런 거지 하며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추켜주는 멋진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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